석유가 세계를 정복한 방법 - 교통, 교육, 의료, 경제, 식량 개혁

     


19세기는 석유에 의해 변화되었다.

20세기는 석유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리고 21세기는 석유를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누가 이 석유 산업을 낳았을까.

그들은 석유가 쥐어 준 엄청난 부와 권력으로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탈탄소 세계에서 그 힘을 가지고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의 세상을 있게 한 석유재벌과 그들이 창조한 세계는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중대한 역사적 실화이다. 동시에 공교육에서 절대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 역사이다.

농장에서 마켓까지, 종자에서 비료까지, 병원에서 의약품까지, 군대에서 전쟁까지, 재단에서 교육까지, 자동차에서 고속도로까지, 파이프라인에서 플라스틱 제품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일상에서 석유 화학 산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생활 분야와 사회 분야를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석유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야기이다.

일부 석유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 내연기관 엔진과 세계 교통의 변화, 중동의 사우드 가문과 석유 전쟁.

그러나 다른 부분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석유에 대한 연구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현대 의학"의 뒤를 받치며 수익을 창출하는 석유화학, "녹색 혁명"과 "유전자 혁명"의 식량 산업의 뒤를 받치고 있는 빅 오일 머니.

1. 석유가 세계를 정복한 방법

2. 석유가 세계를 정복한 이유

앞으로 두 번의 포스팅을 통해 그들이 세계를 건설한 일련의 과정과 세계 정복을 통해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조감하는 눈을 띄울 수 있도록. 현세의 흐름을 직관적으로 간파할 수 있도록.

이것은 현대인들 모두가 알아야 할 역사이다.


빅 오일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된다.

최초의 석유 붐이 있었던 곳은 펜실베니아가 아니라, 19세기 초 뉴욕주의 시골 후미진 숲이다. 석유 붐의 출발은 원유나 그 파생상품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생산품에서 출발한다. 바로, 뱀 기름(Snake Oil).

유명한 암 전문가로 알려진 빌 리빙스턴 박사(Dr. Bill Livingston)는 의사도 암 전문의도 아닌 떠돌이 뱀 기름 판매원이었다. 사실 그의 진짜 이름은 리빙스턴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암 치료제로 판매한 "록 오일(Rock Oil)"은 설사제와 석유를 섞은 쓸모없는 혼합물이었고, 응당 그에게 속아 록 오일을 산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암에는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사기꾼의 삶을 살았고, 그가 속였던 사람들로부터 항상 도망쳐 다녔고, 사기 전적의 은폐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점점 더 터무니없는 속임수를 쓰며 살았다. 동시에 그는 단란한 황혼 결혼을 시작하기 위해 첫 번째 부인과 여섯 명의 자녀들을 버리고 캐나다에서 세 번째 부인과 두 아이를 더 낳았다. 이어 1849년 카유가에서는 한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되기까지에 이른다. 강간자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에 그는 "리빙스턴"이라는 새 이름을 채택하여 사용한다.

빌 리빙스턴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배반하는 상거래의 요령을 가르치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육아 기술을 다음과 같이 자랑한 적도 있다: "나는 틈만 나면 내 아이들을 속인다. 아이들을 기민하고 날카롭게 만들고 싶어서."

빌 리빙스턴은 180cm 이상 큰 타고난 키와 잘생긴 외모로 "빅 빌(Big Bill)"로 통했다. 사람들은 관대를 조금 덜어 그를 "악마 빌 (Devil Bill)"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윌리엄 에이버리 록펠러 (William Avery Rockfellar) 1810~1916

"악마 빌"이라 불리었던 그의 진짜 이름은 윌리엄 에이버리 록펠러(William Avery Rockfellar), 바로 1870년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하고 석유 독점을 쟁취하여 석유로 세계 최초의 억만장자가 된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dson Rockfellar)의 아버지였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돈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배신과 속임수로 점철된 "악마 빌"의 이미지를 그대로 본떠 만들어진 세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배반, 기만, 은폐, 그리고 대중의 순진함에 철저히 바탕을 둔 세계이다. 지난 세기 동안 록펠러들과 그들의 동족들은 "이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사람들을 상대로 형언할 수 없는 기만의 덫을 펼치며 살아왔다.

이것은 석유재벌에 대한 이야기이다.

1부: 석유재벌의 탄생

1857년 티투스빌, 한 남자가 철도차에서 오일 크릭 해안에 있는 졸린 서부 펜실베니아 마을 한가운데에 도착한다: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 (Col. Edwin Drake)이다. 펜실베니아 록 석유 회사에 소속된 그는 석유를 모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빌 박사처럼 에드윈 드레이크 역시 실제 대령이 아니다. "대령"은 펜실베니아 록 석유회사를 설립한 변호사인 조지 비셀과 은행가인 제임스 타운센드가 그에게 이 부여한 가상 호칭이다. 그들은 드레이크를 대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지역 주민들의 존경을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사실 에드윈 드레이크는 실직한 전직 철도 차장이었으며 2년 전 조지 비셀과 같은 호텔를 묵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석유회사에 취직하게 된 것이었다

조지 비셀제임스 타운헨드는 펜실베니아 지역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세네카 기름 (Seneca Oil)을 증류하여 램프 오일이나 등유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펜실베니아 록 석유회사(Pensylvania Rock Oil Company)를 설립했다. 그리하여 드레이크 대령은 원료가 되는 세네카 기름을 모으기 위해 펜실베니아 마을을 방문한 것이었다.

어쨌든 펜실베니아 마을의 현지인들 드레이크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세네카 기름은 실제로 풍부하고, 시냇물에 스며들어 거품이 일며, 개울에서 채취되는 것이 맞지만, 지역 제재소의 기계를 위한 치료제나 기름으로만 여겨졌을 뿐 별 다른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네카 기름을 추출해가는 일은 완전히 골칫거리였다. 피츠버그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던 소금 산업의 중추 역할인 브라인 우물을 오염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완성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바로, 세네카 오일을 램프 오일로 증류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석유를 모으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려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역사적으로 물이 스며드는 근처의 개울을 둑으로 막고 꼭대기에서 기름을 걷어내서 기름을 모았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이런 식으로 하루에 6갤런에서 10갤런의 기름만 모을 수 있을 뿐이었다. 갱도를 파려고도 했지만 지하수가 빠르게 범람했을 뿐이다.

1859년 여름쯤 그는 절박해졌다. 드레이크의 아이디어는 바닥나고, 비셀과 타운센드는 인내심이 바닥나고, 가장 중요한 것은 회사의 자금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증기로 움직이는 장비로 브라인 우물을 시추한 경험이 있는 피츠버그 대장장이 빌리 스미스에게 눈을 돌리고 결국 석유에 닿기 위해 셰일 암반을 뚫고 구멍을 뚫게 된다. 조잡한 장비들이 하루에 3피트나 되는 암반을 통과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미칠 정도로 느린 작업이었다.

8월 27일까지 드레이크는 69피트 반 정도 되는 깊이를 드릴로 뚫었고, 드레이크는 마지막 자금을 사용했으며 비셀과 그의 파트너들은 작전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8월 28일, 그들은 마침내 석유를 발견한다. 1859년 8월 28일 일요일, 드디어 기름이 파이프에 거품을 일으켰다. 빌리 삼촌과 그의 아들 샘은 기름을 몇 양동이나 퍼냈다.

그리고 다음날인 월요일, 드레이크 대령이 그의 마지막 급여와 작업 중단 명령을 받은 바로 그 날, 빌리와 샘은 보행빔을 양수기에 연결했고, 마침내...드디어..! 기름이 흐르기 시작했다!!

몇 년 후 한 지역 신문은 빌리 삼촌이 석유를 발견했던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터뷰했다.

"월요일 저는 시추를 시작했고 오후 4시가 되자 기름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드레이크 씨에게 말했죠. '저길 봐요! 어때요!' 드레이크 씨는 파이프를 내려다보며 물었습니다. "저게 뭐에요?" 그래서 저는 대답했죠. "그건 당신의 재산이에요!" 그들의 첫 번째 석유는 배럴당 40달러에 팔렸다.

에드윈 드레이크는 구멍을 뚫어 시추함으로써 석유가 풍부하게 발견되고 값싸게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정확히 증명했다.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산업이 탄생한 것이다. 머지 않아 전 세계 수백만 가구, 농장, 공장에서 웨스트 펜실베니아 원유에서 정제된 등유로 "램프"가 켜졌다.

드레이크가 석유를 터뜨렸다는 말이 나오자 서부 펜실베니아의 좁은 골짜기 여기저기에 '미친 양키가 석유를 터뜨렸구나! 미친 양키들이 기름을 터뜨렸다!'라는 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그것은 최초의 대호황었다. 마치 골드러시 처럼.

그렇게 펜실베니아 시골의 한적한 농경지는 하룻밤 사이에 번잡한 석유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개척자들이 평지를 임대하고, 마을들이 갑자기 생겨나고, 석유 시추 장치들이 땅을 뒤덮고 있었다.

최초의 석유 붐이 도래했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 (John Davison Rockfeller) 1839~1937

클리블랜드에는 이 석유 붐을 최대한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느 한 사내가 있었다. 숫자에 밝은 유망한 젊은 회계사, 바로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feller)였다. 또 다르게는 존 D. 록펠러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악마 빌"이 던져주는 온갖 기만을 먹고 자라 기민이 온몸에 깃든 그는 냉소로 무장한 듯 퇴색된 눈망울과 앙다문 입술이 특징적이었다. 한 치의 온정도 허락치 않겠다는 그의 내심이 말이 아닌 얼굴을 통해 있는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듯 하였다.

존 D는 인생에서 두 가지 야망을 품고 있었다:

10만 달러를 버는 것과 100세까지 사는 것.

기만적 상거래 술법을 온몸에 익힌 어린 존 D는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빌린1,000달러를 씨드머니로 활용하여 재산을 키워나가기로 다짐했다.

존 D의 손자 데이비드 록펠러는 할아버지 데이비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그의 아버지로부터 1,100달러를 빌려서 클리블랜드로 떠났죠. 그리고 막 시작한 석유 사업에 대해 읽고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당시 석유 사업이 매우 변덕스러운 사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1863년, 석유 붐을 보고 신생 사업에서 얻을 이익을 감지한 24세의 젊은 존 D 록펠러는 동료 사업가 모리스 B 클락 (Maurice B Clark)사무엘 앤드류스(Samuel Andrews)과 함께 파트너십을 맺었다. 화학자 사무엘 앤드류스는 정유 공장을 지었지만 정유된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사업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 상태였다.

1865년, 빈틈없는 존 D 록펠러는 파트너들을 72,500달러에 매수했고, 사무엘 앤드류스를 파트너로 삼아 록펠러 & 앤드류스(Rockefeller & Andrews)를 출범시켰다. 록펠러는 미국 경제를 변화시킬 움직임으로, 모든 개인 석유업자들을 차례로 인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의 석유 업계를 자신이 지배하는 하나의 거대 기업으로 대체하겠다는 야망이었다. 5년간의 전략적 제휴와 합병 끝에 1870년 록펠러는 마침내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을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 불안정한 석유 산업을 통합하여 지배하려는 그의 초기의 목표를 달성하며 파괴적인 연쇄 효과를 일으켰다. 당시 록펠러는 운송비가 가장 저렴한 정유사가 모든 경쟁자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경쟁자들을 차례로 점령하기 위한 전략으로 남부 개선 회사(South Improvement Company)라는 철도 회사와 밀약을 맺었다. 록펠러와 동맹사들은 대규모의 정기 운송을 대가로 경쟁사들 보다 훨씬 저렴한 운송료를 확보한다.

한 석유 생산업자의 딸인 아이다 타벨(Ida Tarbell)은 아버지와 동료 석유 업계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애썼던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두고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 "불안한 소문이 석유 업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운임금리가 오르고 있었어요... 게다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인 남부 개선 회사의 모든 회원들은 이를 면제받고 있었죠. 그것은 분명 '음모'였어요."

록펠러의 전기 작가 론 처나우(Ron Chernow)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록펠러는 40세가 되는 1879년, 세계 석유 정제사의 90%를 지배한다. 몇 년 후에 그는 석유 마케팅의 90%와 모든 석유의 3분의 1을 장악할 것이다. 이 젊은이는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상품이 될 상품에 대해서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인 독점을 취하며 석유 시장을 절대적으로 컨트롤하고 있다."

1880년대까지, 미국 석유 산업은 스탠더드 오일 회사 그 자체였다. 그리고 스탠더드 오일 회사는 존 D 록펠러 그 자체였다.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의 경쟁자 등장

1) 로스차일드 & 노벨 가문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야망을 가진 소수의 가문들이 지구의 다른 저편에서 스탠더드 오일의 성공 스토리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록펠러의 경쟁자들은 1870년대에 코카서스(Caucasus)에서 나왔다. 코카서스는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이 카스피해의 광대한 석유 매장지를 민간 개발에 개방했던 곳이다. 소위 물반 기름반일 정도로 엄청난 석유가스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 카스피해 기름밭을 차지하기 위해 개인과 국가들은 초반부터 치열한 영해 전쟁을 펼쳤다.

카스피해 옆 코카서스 위치

• 노벨 가문 - 루드윅 노벨이 이끄는 가문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창조한 동생 알프레드 노벨을 포함한다.

• 로스차일드 가문 - 알퐁스 로스차일드가 이끄는 악명 높은 로스차일드 은행 왕조의 프랑스 지부

노벨과 로스차일드의 두 가문은 재빨리 힘을 합쳐 러시아가 허용한 코카서스 민간 개발 기회를 이용했다.

1891년 로스차일드(Rothschild) 석유 운송을 위해 마커스 사무엘이 런던에 본사를 두고 경영하는 극동 해운회사인 M. Samuel & Co.와 계약을 맺었다. 그 후 로스차일드은 노벨(Nobel)제공한 카스피해 기름을 수에즈 운하를 통해 동아시아 시장으로 운송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협업 프로젝트는 어마어마했다; 수에즈 운하 회사에 의해 승인될 최초의 유조선을 만들기 위해 정교한 엔지니어링이 요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비밀도 수반되어야 했다. 그들의 노력에 대한 소문이 록펠러의 귀에 흘러 들어가면 스탠더드 오일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비밀 엄수와 기술 개발을 착실히 진행시킨 로스차일드/노벨 팀은 결국 성공을 거두어 최초의 벌크 유조선인 무렉스(MURRX)를 탄생시켰다. 코카서스의 석유를 한가득 실은 그들의 무렉스는 1892년 수에즈 운하를 유유히 통과하며 태국으로 향했다.

1897년 M. Samuel & Co.는 Shell Transport and Trade Company가 되었다. 사무엘의 Shell은 로스차일드/노벨 카스피해 기름에 대한 의존으로 회사가 공급 충격에 취약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석유 공급원을 찾아 극동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동쪽의 보르네오에서 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에서 석유 매장량을 개발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의 지원으로 1890년 헤이그에 설립된 로열 더치 석유(Royal Dutch Peyroleum)와 맞닥뜨렸다. 말그대로 네덜란드 왕가가 직접 운영하는 석유회사였다. 스탠더드 오일과의 경쟁을 염두에 둔 Royal Dutch와 Shell은 1903년 아시아 석유회사(Asiatic Petroleum Company)로 합병해 프랑스 로스차일드와 공동 소유했으며, 1907년 회사명을 로열 더치 셸(Royal Dutch Shell)로 변경하였다.

(로스차일드 + 노벨) + 로열 더치 석유

M. Samuel & Co. Shell 아시아 석유회사 로열 더치 셸

사무엘 사무엘 + 로스차일드

사무엘의 평범한 조개껍데기(Shell)는

네덜란드 왕족을 만나 네덜란드산 왕족 조개껍데기(Royal Shell)가 됨

2) 이란 부르마 석유

스탠더드 오일 왕좌에 대한 또 다른 세계적인 경쟁자가 20세기 초에 이란에서 나타났다. 1901년, 백만장자 사교계의 명사 윌리엄 녹스 다르시(William Knox D'arcy)는 페르시아 왕과 놀라운 양보안을 협상했는데, 그것은 60년 동안 페르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석유를 탐사할 수 있는 석유 독점 권리였다. 다르시와 그의 파트너 글래스고의 버마 오일(Burmah Oil)은 7년이라는 시간동안 페르시아 곳곳에서 꾸준히 석유를 탐사했지만 드넓은 땅에서 유전 찾기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해 실의에 빠진 그들은 모든 작업을 그만두고 페르시아를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한다. 1908년 5월 초, 그들은 탐사 지질학자에게 모든 직원들을 해고하고 장비를 해체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탐사 지질학자는 지금껏 해온 수고가 아까워 명령에 불복종했고 직원들을 데리고 탐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몇 주가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마침내 기.. 기름을 발견했다!

석유 로또가 터진 버마 오일(Burmah Oil)은 그 즉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를 분리 신설하여 페르시아 석유 생산을 전담 감독하게 하였다. Anglo-Persian Oil은 1914년 당시 해군 제독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명령으로 영국 왕실이 회사 주식의 51%를 장악하면서 개인에서 국가적 차원으로 발전해갔으며 이 회사는오늘날까지도 BP로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자동차 가솔린 엔진 발명 vs 전기차

로스차일드와 노벨 가문, 네덜란드 왕족, 록펠러 가문, Shell - 석유 산업의 초기 거물들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부를 축적하고 확장시키는 새로운 모델을 개척했다. 그들은 석유와 석유 지배를 중심으로 우물에서 펌프까지 건설한 새로운 석유 재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돈"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20세기의 핵심 에너지 자원인 이것의 독점화는 재산뿐만 아니라 수십억의 삶을 지배하는 "권력"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수십억의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공급하는 '석유'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석유가 20세기의 핵심 자원이 될 것이라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새로 상업화된 전구의 값싼 조명이 램프 오일 시장을 파괴하기 시작하자, 석유회사들은 그들의 독점으로부터 가치를 잃을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석유재벌들이 낙심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 때 갑자기 예상치 못한 운이 들이닥쳐 그들의 운명을 가중시키려 했다.

전구가 상업적으로 도입된 바로 다음 해, 석유 산업을 살리기 위한 또 다른 발명품이 나왔던 것이다: 독일의 엔지니어 칼 벤츠(Karl Benz)는 신뢰할 수 있는 2행정 내연 기관 엔진 특허를 얻었다. 이 엔진은 또 다른 석유 부산물인 가솔린(휘발유)으로 작동했고, 1888년 역사상 최초로 상용화된 자동차가 된 벤츠 모터와겐(Benz Motorwagen)의 기반이 되었다. 이로써 절벽의 낭떠러지에서 비틀대던 록펠러와 다른 석유회사들이 수십 년 동안 통폐합하며 보냈던 사업은 램프에서 자동차 가솔린으로 대체품을 찾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엔진의 시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행운이 필요했다. 자동차 시대 초기에는 휘발유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고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바로 전기자동차가 대두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전기 장치는 내연 기관보다 유리했는데, 그것은 기어 변속이나 손으로 크랭킹할 필요가 없었고 가솔린 엔진과 관련된 진동, 냄새 또는 소음이 전혀 없었다.

이런 전기자동차의 작동 모델은 1830년대부터 있었고, 최초의 전기자동차는 1884년에 만들어졌다.1897년까지 런던 주변에는 승객들을 태울 수 있는 전기 택시가 있었다. 그리고 1898년에 전기 자동차에 의해 세계 육상 속도 신기록이 세워졌다. 그렇게 20세기 초까지 전기자동차는 미국 자동차의 28%를 차지했다.

두 번째 석유 붐

행운은 1901년 1월 10일 동부 텍사스의 Spindletop에서 시굴자들이 석유를 발견했을 때 또 다시 개입됐다. 이 분유정은 하루에 100,000배럴을 분출하여 미국에 다시 석유 붐을 일으켰다. 이 석유붐은 값싸고 풍부한 석유를 원활히 공급하고 휘발유 가격을 낮추기에 이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값비싼 전기 엔진이 완전히 버려지고 크고 시끄럽고 가스를 뿜어내는 엔진이 도로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엔진은 모두 Standard Oil, Shell, Gulf, Texaco, Anglo-Persian 그리고 다른 석유 메이저들이 시추하고 정제하고 판매하고 있던 석유를 연료로 활용했다.

그러나 존 D 록펠러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스탠더드 오일을 통해 축적한 전례 없는 부에 분노한 대중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Ida Tarbell과 같은 엉터리 기자들은 철도 음모, 경쟁자와의 비밀 거래 및 기타 그늘진 관행을 통해 그가 집권하는 과정에 대해 깊게 파기 시작했다. 언론은 그를 말그대로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준 거상"이라고 묘사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촉수가 국가의 생명을 갉아먹는 위협적인 문어였다. 청문회가 시작되고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그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1년 대법원은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렸다.

1911년 5월 15일, 미국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이 무역을 제한하는 독점 기업이며 해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록펠러는 지역 가톨릭 교회의 신부인 J.P. 레논 신부와 함께 Kykuit에서 골프를 치던 중 이 결정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리고 록펠러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반응했다. 그는 가톨릭 신부에게 몸을 돌려 "레논 신부님, 돈이 있으십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부는 질문에 매우 놀라 "아니요, 왜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록펠러는 말했다. "스탠더드 오일을 사세요"

록펠러가 예견했듯이, 개별 스탠더드 오일 회사들은 단일 기업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들의 주식은 두 배, 세 배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현금 쓸어담기가 끝날 무렵 록펠러는 역사상 가장 큰 개인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는 미국 경제의 거의 2%에 달하는 액수였다.

록펠러의 이야기는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의 이야기에 완벽하게 반영되었다. 타이터스빌에서 석유를 팔고 수십억 달러의 세계 산업을 창출한 드레이크는 시추 기술에 대한 특허를 낼 선견지명이 없었고 심지어 자신의 우물 주변의 땅을 사들일 선견지명이 없었다. 그는 1880년에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펜실베니아 연방으로부터 연금을 받는 등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석유정치에 있어서, 록펠러의 흥망성쇠의 교훈은 분명했다. 독점이 더 무자비하게 추구될수록, 통제가 더 엄격해질수록, 권력과 돈에 대한 욕망이 커질수록 결국 보상은 더 커진다.

이제부터 어떤 발명품도 석유 메이저의 완전한 통제를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경쟁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석유재벌에 대한 어떠한 위협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2부: 경쟁은 죄악

독점 반대 세력 무너뜨리기

스탠더드 오일이 독점을 이루기 위해 추구했던 배신과 기만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경쟁은 죄악 (Competition is a sin)"이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이 바로 독점자의 사고방식이다. 종교적 프레임을 활용해 짜여진 이 정당성은 감히 그들의 왕좌에 오르려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도록 허용했다.

석유 vs 알코올 - 알코올 연료 없애기

역설적이게도, 석유재벌의 초기 외부 위협인 알코올 연료를 발생시키는 데 도움을 준 것은 20세기 초의 석유재벌들 사이의 경쟁이었다.

역사학자 라일 커민스가 언급했듯이: "록펠러 vs 로스차일드 vs 노벨 vs 마커스 사무엘의 Shell 간의 석유 신탁 전쟁은 항상 석유 가격을 유동적인 상태로 만들었고, 엔진은 때마다 사용 가능한 연료에 적응해야 했다."

석유를 구할 수 없었던 많은 지역에서 대안은 알코올이었다. 에틸 알코올은 19세기 초부터 램프와 엔진의 연료로 사용되었다. 알코올 연료는 일반적으로 더 비싸지만 석유 공급에 예측 가능한 접근이 불가능한 런던이나 파리와 같은 지역에서는 매력적인 공급 안정성을 제공했다.

알코올은 가솔린보다 낮은 열값, 즉 BTU를 가지고 있었지만 1907년과 1908년에 미국 지질조사국과 해군이 실시한 일련의 테스트는 알코올 엔진의 높은 압축비가 낮은 열값을 완벽하게 상쇄하여 알코올과 가솔린 엔진의 연비를 동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초기 알코올 연료 지지자 중 한 명은 헨리 포드(Henry Ford)였다. 헨리 포드의 유명한 모델 'Model T'은 옥수수와 곡물로 만든 연료를 사용하도록 설계되었고 포드는 이에 대한 새로운 시장의 기회를 감지하고 뉴욕 타임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래의 연료는 길가에 있는 과일이나 사과, 잡초, 톱밥 등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것에서 나올 것이다. 발효될 수 있는 모든 식물성 물질에는 연료가 있다."

이는 농부들에게 절대적으로 희소식이었다. 이를 활용하기 위해 농부들은 남북 전쟁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부과되었던 갤런당 2.08달러의 알코올 세금 폐지를 위해 로비를 행사했고, 석유재벌의 독점을 무너뜨리기 위해 알코올 연료 관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6년 미 의회에서 주류세 폐지 법안을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스탠더드 오일 회사는 주로 불공정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국내 경쟁을 진압하고 독점을 쟁취했다. 예술이나 제조업에서 사용되는 알코올을 자유자재로 선정해 경쟁의 요소로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침내 알코올세가 1906년에 폐지되고 한동안 옥수수 에탄올 갤런당 14센트로, 갤런당 22센트인 휘발유보다 훨씬 저렴했다. 저렴하고 특허가 없으며 독점할 수 없는 연료 생산에 대한 약속은 전국을 휩쓸고 알코올 연료는 득세를 보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적으로 생산될 수 있는 값싸고 풍부한 연료는 석유 재벌들이 생각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석유 재벌들은 알코올 엔진에 더 많은 제한을 가하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고, 고맙게도, 그들이 찾아낸 답은 이미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19세기 미국에는 음주 문제가 있었다. 1830년까지 15세 이상의 미국인 평균은 연간 7갤런의 순수 알코올을 마셨다. 이는 오늘날의 평균보다 3배 더 많은 양이다. 이와 같은 음주 문제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첫 번째 금주 운동을 일으켰고, 금주 연합을 결성시켰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성장하고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정치적인 성공은 거의 달성해지 못했다. 미국 메인 주는 1851년에 술의 판매와 제조를 불법화하여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 금지령은 5년 동안만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금주 운동에 대한 이러한 흐름은, 1893년 스탠다드 오일이 탄생한 오하이오 주에서 술집 반대 리그(Anti Saloon League, ASL)가 결성되면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ASL은 록펠러의 오랜 친구인 하워드 히데 러셀(Howard Hyde Russell)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록펠러는 부분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록펠러의 후원을 받은 ASL은 알코올 생산 및 판매를 불법화하려는 전국적 운동의 원동력이 되며 알코올 반대에 불을 지폈다.

록펠러는 금주주의자였다. 자신의 사회 도덕적 염려 때문이 아니라 "술을 통한 두터운 친목"이 자신의 사업에 몰락을 초래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알코올 반대 운동의 탄력을 받아 1920년 마침내 국가에 금지령이 내려졌다. 단, 이 때 흥미로운 부작용이 발생했다. 에탄올을 연료로 직접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생산자들은 독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에탄올에 석유 제품을 첨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에탄올을 경쟁에서 물리치는 것 뿐만 아니라 석유 사용의 득세까지 가져온 결과였다. 그렇게 급속하게 늘어나는 값싼 원유의 가솔린과 완전히 경쟁할 수 없었던 알코올 연료는 자동차 산업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대중 교통 수단 전면 교체 - 휘발유 자동차 사용, 고속도로 건설

초기 석유재벌의 막대한 부에 대한 또 다른 실존적 위협은 사회 공학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바로 대중 교통.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자가용 소유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미국인 10명 중 1명만이 자동차를 소유하는 정도였고, 대다수의 대중은 여전히 철도를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주요 도시의 도시 거주자들은 전기 트롤리 네트워크에 의존하여 도시를 이동했다.

전기 트롤리 → 원유 버스

1936년 GM(General Motors)은 파이어스톤 타이어(Firestone Tire), 캘리포니아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of California)과 함께 "내셔널 시티 라인(National City Lines)"이라는 프론트 회사를 설립하여, 노면전차와 철도를 해체하고 GM의 자체 버스로 대중 교통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대체" 프로세스를 구현했다. 계획은 눈에 띄게 성공적이었다.

역사가이자 연구원인 F. William Engdahl은 "신화, 거짓말, 석유 전쟁"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940년대 말까지 GM은 45개 도시에서 100개 이상의 시립 전기 운송 시스템을 구매 및 폐기했으며, 가스 연소 GM 버스를 도로 전면에 배치했다. 1955년까지 미국 전기 전차 노선의 거의 90%가 국가에 의해 해체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제거되었다."

석유산업 부흥을 위해 대중교통 전면 교체를 이끈 이 카르텔에 내셔널 시티 라인(National City Lines)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은퇴한 해군 중령인 에드윈 J. 퀸비(Edwin J. Quinby)에 의해 1946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그는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공공 사업인 전기 철도 시스템을 사취하기 위해 신중하게 계획된 캠페인"이라고 폭로하는 성명서를 썼다. 그는 내셔널 시티 라인과 그 자회사들에 대한 석유 관리들의 주식 소유권을 밝혀냈고 그들이 어떻게 볼티모어, 로스앤젤레스, 세인트 루이스와 다른 주요 도시 중심지의 대중 교통 라인을 차근차근 사들여 파괴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퀸비의 경고는 연방 검사들의 관심을 끌었고, 1947년 내셔널 시티 라인은 교통 독점을 꾀하고 버스와 물품의 판매를 독점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었다. 1949년, GM, 파이어스톤, 캘리포니아 스탠다드 오일, 그리고 그들의 이사직과 기업 동료들은 두 번째 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미국의 대중 교통 인프라를 사들여 해체한 것에 대한 처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작 벌금 5천 달러. 과거 LA에서 1억 달러 규모의 퍼시픽 전기 시스템 폐기를 감독했을 때 퍼시픽 시티 라인의 책임자였던 H. C. 그로스먼은 정확히 1달러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 예상한대로 GM과 그 협력사들은 아무런 곤경에 처하지 않았다.

철도 → 고속도로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시 GM (General Motors)의 회장이었던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게 된 제네럴 모터스 회장 찰슨 윌슨은 바로 록펠러와 연결된 듀폰 가문의 프랜시스 듀폰과 함께,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공공 사업 프로젝트 중 하나인 '주간 고속도로 시스템'의 설립을 지휘했다.

기차표에 대한 소비세가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던 전쟁 기간이었던 당시

연방이 자금을 지원하는 고속도로와 공항이 대중들에게 더욱 저렴한 소비대안을 제공함에 따라, 1945년~1964년 사이에 철도 여행은 84%나 급감했다. 그렇게 석유재벌들이 터뜨린 포문을 시작으로 석유 관련 대기업들과 귀족 가문들 그리고 정부의 유착은 대중 교통 수단의 대대적 전환을 이끌었다. 응당 이 사회 공학은 바로 스탠더드 오일을 비롯하여 석유 화학 관련 회사들의 훌륭한 성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디트로이트의 차량 생산량은 1940년 연간 450만 대에서 1965년 1,100만 대 이상으로 거의 3배 가량 증가했다.

독일 vs 영국

그러나 석유 독점에 대한 모든 반대를 분쇄하기 위해 노력하는 석유재벌은 록펠러뿐만이 아니었다. 지구 건너편에서 유럽의 석유재벌들은 신생 경쟁자들로부터 자신들의 석유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독일 :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사업 → 터키 석유 점령 시도

1889년, 지멘스의 도이치 은행(Deutsche Bank, 독일의 은행)이 이끄는 독일 투자자들의 컨소시엄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바그다드를 경유하여 베를린과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를 연결하는 철도 연장에 대해 터키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장장 99년 동안 진행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사업은 철도가 티그리스 강을 따라 아직 개발되지 않은 메소포타미아 석유 지역의 심장부를 관통함에 따라 특히 수익성이 좋은 거래였기 때문에 대영제국의 배후에 있는 강대국들은 독일의 군사적 발흥을 우려하여 이 협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세기 말 독일은 지난 30년 동안 독일 경제가 성장했던 것처럼 성장하면서 산업 수출의 출구를 찾고 있었으며, 그들은 터키가 독일을 위한 이상적인 전략적 무역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도이치 은행의 책임자 중 한 명인 게오르크 폰 지멘스(Georg von Siemens)는 베를린에서 바그다드까지 철도를 연장하는 전략을 떠올렸다. (당시 그곳은 오늘날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고, 바그다드, 이라크는 페르시아만 근처에 있었다)

베를린 - 바그다드 철도 사업

독일은 터키에 경제적으로 20세기에 진입시킬 거대한 잠재 시장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독일군은 터키군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독일 산업은 터키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또한 도이치 은행은 광물 권리를 협상했는데, 이는 철도의 양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되는 영역이었다. 그 곳은 1914년에 이미 모술과 다른 지역들과 함께 엄청난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던 영역이었다.

19세기 말 영국 해군의 수장인 잭 피셔(Jack Fisher)는 영국 해군에게 군함 설계의 모든 측면에서 질적인 전략적 향상을 가져올 것이라며 석탄 화력에서 석유 화력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페르시아로 건너가 페르시아의 석유 권리를 탈취하기에 이른다. 당시 쿠웨이트의 페르시아만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음을 안 영국은 쿠웨이트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알-사바 가문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앞으로 영국 총독의 승인 없이 쿠웨이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민지 계약서를 함께 작성했다.

영국군은 독일군이 바그다드로 향하는 이 철도 계획을 보고 놀라며 "이 철도 연장은 병사들을 철도 차량에 태워 쓰러뜨릴 수도 있고 영국 해군의 석유 생명줄을 위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독일을 영국의 해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독일군의 전략적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이 계획을 통해 유라시아 전역에서 러시아로, 벨로루시와 서유럽으로 연결되는 고속철도 선로를 갖게 될 것이며, 이는 중국을 통제하고 중앙아시아를 통제할 수 있는 미국 해군의 능력을 크게 저해할 수 있다.

영국 대응 : 터키 국립 은행 설립 → 터키 석유 회사 설립

Anglo-Persian Oil에 대한 숨겨진 지배 지분을 가진 영국 왕실을 포함한 영국 석유재벌들과 Royal Dutch Shell의 마르쿠스 사무엘은 그들의 상업적, 전략적 이익에 대한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려고 했다. 여기서도 보이듯이 본래 정부와 기업의 경계는 없다. 정부도 하나의 거대한 비지니스임에 그저 또 다른 대기업과도 같으며 이런 메커니즘은 정부 탄생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동일하다.

그들은 아르메니아 태생의 귀화 영국 시민인 칼로스테 쿨벤키안 (Calouste Gulbenkian - Royal Dutch/Shell 합병의 설계자)을 독일 대응 카드로 사용했는데, 그는 나중에 인터뷰를 통해 "독일인에 대항하여 영국의 영향력이 터키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참여했다"고 회상했다. 그것이 그의 임무였다면 그것은 놀라운 성공이었다.

1909년 영국은 이름과 껍데기만 터키를 표방한 터키 국립 은행 "Turkish"를 설립했다. 런던 은행가 Edward Cassel(에드워드 카셀)과 Barings 은행가 Hugo Baring(휴고 배링) 그리고 Gulbenkian(굴벤키안)과 같은 이사들과 함께 설립된 이 은행은 1912년에 터키 석유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이라크의 석유가 풍부한 유전을 이용하기 위해 명시적으로 개입한 굴벤키안은 바그다드 철도를 따라 40km에 달하는 석유가 풍부한 지역을 소유한 도이치 은행을 동업자로 만들기 위해 거래를 중개했다. 주식은 분할되어 영국 정부의 Anglo-Persian Oil Company가 지분의 절반을 소유하고, Royal Dutch Shell과 도이치 은행이 나머지 절반을 분할하여 소유했다.

독일 : 터키 석유 점령 vs 영국 : 이라크 석유 점령

터키의 석유 지분을 인수하려는 독일의 계획은 성공적이었지만 놀랍게도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영국의 굴벤키안은 1914년 6월 28일 대공 Ferdinand(페르디난드)가 사라예보에서 총에 맞아 암살당한 날 이라크의 석유 채굴에 대한 협상을 마쳤다. 영국이 수년 동안 중개해 온 독일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중개한 동맹, 프랑스와 러시아가 관련된 동맹이 발동되었고 세계는 전쟁에 휩싸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영국과 동맹국들은 어쨌든 이라크와 그 석유 매장지를 점령했고 독일은 완전히 차단되었고 그들의 책략적인 하인 굴벤키안은 새로 채굴된 국가에서 모든 유전 수익금의 5%를 받았다.

오일 쇼크 - 미국 vs OPEC

1973 빌더버그 회의 in 스웨덴

세기가 지남에 따라 석유 산업은 초기에 석유 산업을 지배했던 소수의 가족들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석유 매장지는 전 세계에 위치해 있었고, 이를 위해 각국에서 국가 차원의 자원이 수집되었다. 이제 석유재벌의 이익에 대한 위협은 다자간, 다국적 대응을 필요로 했고, 이러한 거래의 결과는 전세계적으로 감지되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미국은 경제를 견실하게 유지하기 위해 수입 석유에 의존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 석유 의존도가 높은 미국의 악몽이 현실이 되었다. 중동과 남미의 13개 산유국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결성했다. 1973년 OPEC은 욤 키푸르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지원했던 다른 국가들과 미국에 대해 석유 금수 조치를 취했다. 이에 가스 부족이 전국을 휩쓸면서 미국 경제는 궁지에 몰렸다. 1973년의 이 오일쇼크는 이미 역사책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위기와 그에 따른 대응이 사실 1973년 스웨덴에서 열린 비밀 회의에서 몇 달 전에 준비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빌더버그 회의는 1954년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왕자에 의해 결성된 비밀 단체인 빌더버그 그룹 (Bilderberg Group)의 연례 모임으로 전 세계 엘리트 그룹의 비밀 회의이다.

네덜란드 왕실은, 네덜란드 왕족 석유 회사(Royal Dutch Petrolium)에 왕실 각인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빌헬미나 여왕이 영국-네덜란드 석유 보유권과 다른 투자로 인해 세계 최초의 여성 억만장자가 된 시절부터, Royal Dutch Shell의 최대 주주 중 하나인 로스차일드 가문과 함께 여전히 왕족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빌더버그 그룹에 의해 열린 이 회의의 참석자들을 위해 작성된 '버나드(Bernhard)의 초청자 명단'은 석유재벌계에서 버나드의 위치를 반영한다. 버나드는 네덜란드의 장교였으며 율리아나 여왕의 부군이었다. 스웨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버나드 자신을 포함하여 스탠더드 오일의 데이비드 록펠러 (David Rockefeller)와 록펠러의 제자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에드몽드 로스차일드 남작, Exxon의 부사장 EG 콜라도(E.G. Collado), British Petroleum의 이사인 데니스 그린힐(Denis Greenhill), 버나드의 Royal Dutch Shell의 사장인 게릿 웽거(Gerrit A. Wagner)였다.

석유 위기가 시작되기 5개월 전에 스웨덴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석유재벌계와 그들의 정계 및 재계 우방국들은 미국 달러의 세계 지배권을 위협하는 통화 위기에 대한 대응을 계획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협상된 브레튼 우즈 체제 하에서 세계 모든 통화가 금에 고정되어 있던 당시 미 달러화는 온스당 35달러로 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세계 통화 시스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지출 증가와 수출 감소로 인해 독일, 프랑스 및 기타 국가에서 달러로 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공식 금 보유량이 급감하고 수요의 흐름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브레튼 우즈를 포기하고 세계 기축 통화로서의 달러의 위치를 위협했다.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나는 재무장관에게 투기자들로부터 달러를 방어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 나는 코널리(Connally) 장관에게 통화 안정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결정된 금액과 조건을 제외하고 달러화를 금이나 기타 준비 자산으로 전환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1973년 빌더버그 회의에서 유출된 문서들이 보여주듯이, 석유재벌들은 미국의 패권을 구하기 위해 석유의 흐름을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빌더버그 회의 참석자들은 OPEC이 "세계 통화 시스템을 완전히 해체하고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에너지 위기 또는 에너지 비용 증가"를 대비했는데, 이것은 현재 배럴당 3.01달러보다 400%나 오른 10달러에서 12달러 사이의 유가를 의미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5개월 후, 빌더버그의 참석자이자 닉슨 대통령의 국무장관 역할을 하는 록펠러의 제자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첫번째 작전에 들어갔다. 헨리 키신저는 욤키푸르 전쟁을 조종했고 OPEC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OPEC의 반응은 이스라엘을 지지했던 다른 나라들과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였다. 1973년 10월 16일, OPEC는 유가를 70% 인상했다. 12월 회담에서 이란의 샤에 대해 배럴당 11.65달러 즉, 위기 이전 석유 가격의 400%까지 가격을 인상할 것을 요구했고 이란은 이를 받아들였다. 사우디 국왕 파이잘의 개인 특사가 왜 그렇게 과감한 가격 인상을 요구했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한다면, 워싱턴으로 가서 헨리 키신저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작전의 두 번째 움직임에서 헨리 키신저는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거래 협상을 도왔다. 미국의 무기와 군사 보호의 대가로 사우디는 향후 석유 판매 가격을 모두 달러로 매기고 월 스트리트 은행을 통한 국고 매입을 통해 달러를 재활용하려 했고, 이 거래는 석유회사들에게 엄청난 성공이었다; 그들은 가격 인상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은행으로 흘러들어가는 엄청난 돈의 흐름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이란의 샤는 이란 국영석유회사의 수익을 록펠러 소유의 체이스 은행에 보관했는데, 이는 석유 위기 이후, 매년 140억 달러에 달하는 수입이다.

"페트로 달러(석유 달러)"라는 이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지면서, 석유재벌들은 경제에 대한 전례 없는 수준의 통제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상품인 석유로 세계 화폐 시스템을 뒷받침했고, 이것은 그들의 통제하에 있는 모든 신생 생산국들에게 잠재적 경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적 거물들의 끝없는 욕망은, 세계의 화폐 제도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3부: 대대적 사회 개혁

사회 환원이라는 미명 하에

사회 시스템 설계 및 통제

19세기에 철도 음모와 약탈적인 가격 책정은 석유왕조의 독점을 보장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영국 왕실과 네덜란드 왕가, 로스차일드 가문과 다른 유럽 석유재벌들이 중동과 극동을 석유 탐사에 개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목표는 더 이상 석유 산업을 최대화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제 외교를 통제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바로 세상을 통제하고 형성하는 것 그 자체였다. 석유 자원, 석유 자원을 활용한 모든 환경.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석유재벌들은 세상을 전면 개조했어야 했다.

현대의 록펠러라는 이름은 스탠더드 오일보다 록펠러 센터나 록펠러 대학과 연관되는 경향이 더욱 강하기 때문에, 현 시대에서는 당시 존 D 록펠가 그 시대에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촉수로 세상을 목 졸라 죽이는 문어 스탠다드 오일 히드라의 수장이었고, 자신의 석유 독점 정원에서 경쟁자라는 꽃이 피어나면 즉시 무차별적으로 잘라내는 잔인한 정원사였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인 그는 평범한 노동자들과 도움을 구하는 가난한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록펠러는 한 달에 평균 5만에서 6만 통의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그를 따라갔다. 말 그대로 군중이 스탠더드 오일 사무실 주변에 서서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메마른 어린 아이들은 거리에서 울고 있었고 록펠러는 압도당했다.

아이다 타벨과 지저분한 언론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노동자에 의해 경멸을 받으며, 존 D 록펠러는 모든 홍보 산업의 마르지 않는 뿌리가 되었다. 록펠러의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은 간단했다: 홍보 산업을 역이용하라. 존 D 록펠러는 록펠러 부부의 실추된 이미지를 불태우기 위해 현대의 홍보 산업을 발명한 언론인 출신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아이비 리(Ivy Lee)를 고용했다. 록펠러 센터를 지어주고 존 D 록펠러가 공공장소에서 10센트 동전을 나눠주는 것을 촬영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아이비 리였다.

록펠러: "저는 여러분과 저에게 항상 친절히 잘해주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감사함을 느낍니다."

시민: "왜냐하면 당신은 모두에게 잘하기 때문이죠."

아이비 리(Ivy Lee)가 록펠러의 대중적 이미지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도 록펠러는 일종의 미국인 캐릭터가 되었고 사람들은 기이한 방식으로 그에게 따뜻해졌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이 지팡이와 긴 모자를 쓰고 뉴욕시 거리를 거닐고 있는 것과도 같은 이미지였다.

그야말로 아이비 리의 가장 뛰어난 홍보 활동은 록펠러를 "10센트를 주는 남자"로 이미지 캐스팅한 것이었다.

이러한 홍보 작업은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 분명히 다루기 힘든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엔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클리블랜드의 레이크 뷰 묘지에 있는 존 D 록펠러의 마지막 안식처 위에 우뚝 솟아 있는 70피트 높이의 돌 마커에 10센트를 남기고 있다. 클리블랜드의 레이크 뷰 묘지에서. 그러나 록펠러를 대중의 영웅으로 변모시킨 것은 이러한 무대 기획뿐만이 아니었다.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록펠러는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만 했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바로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 그러나 그의 아버지 "악마 빌"이 그에게 가르쳤듯이 존 록펠러는 모든 사업 거래에서 항상 본인에게 더 이득이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초점을 맞췄다. 그는 자신의 막대한 부를 공공기관의 설립에 "기부"했지만, 그렇게 설립된 기관들은 결국 사회를 그의 의지에 따라 조종하는 데 사용되어 오히려 그의 부를 더욱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교육 개혁

국가 교육 - 학교 설립

역사를 통틀어 통치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이 깨달았듯이 그들이 원하는 통치를 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근본부터 완전히 뜯어 고쳤어야 했다.

19세기의 미국인들은 여전히 ​​교육과 지적 추구를 중시했으며, 1840년 인구 조사에서 미국은 93%~100%의 놀라운 독자 비율을 가진 독서의 나라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1852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최초의 의무 교육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개인화되고 분권화되어 있던 모든 교육을 차차 통합시켜 나갔다. 그렇게 언어와 역사와 과학에 대한 탄탄한 기초를 포함한 고전 교육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개인들로 구성된 국가는 독점 통치자들에게 그 자체로 혐오였다. 석유재벌들은 고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처할 수 있을만큼 순종적인 노동자 집단들을 많이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처음 출발한 개혁은 교육을 통해 공통된 집단 정신 상태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그의 첫 번째 공공 자선 단체인 시카고 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필자는 그들의 역사를 되짚는 글을 쓰며 한 번 더 깨닫는다. 스스로 사유하는 방식을 가장 억압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역설적이게도 지성 추구를 표방하는 '공교육'임을 그간 가장 개탄스레 여겨왔는데, 실로 공교육 마련의 토대가, 공교육의 근본적 원인부터가 개인이 스스로 사유하는 것을 억압하고 통치를 쉬이하기 위함이었음에 격한 공분이 일지 않을 수가 없다.

록펠러는 친구이자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자선 고문인 침례교 목사인 프레더릭 테일러 게이츠 (Frederick Taylor Gates)의 도움을 받으며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게이츠는 계속해서 록펠러의 교육 계획을 담은 짧은 소책자 '내일의 국가 학교'를 썼다.

"우리는 이 사람들 또는 그들의 자녀들을 철학자나 학식이나 과학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 중에서 작가, 웅변가, 시인, 문인 중에서 키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 화가, 음악가를 찾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제 충분한 공급원을 가진 변호사, 의사, 설교자, 정치인, 정치가, 정치인들을 길러내고자 하는 겸손한 야망조차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1902년 록펠러는 1억 8천만 달러의 엄청난 기부금으로 게이츠의 미래의 국가 학교에 대한 비전을 실천하는 것을 돕기 위해 종합 교육 위원회를 설립했다.

교육에 대한 록펠러의 영향력은 거의 즉각적으로 느껴졌고, 같은 각도에서 자선이라는 주제로 포장하여 접근하고 있던 당대의 동료 독점자들의 도움으로 더욱 증폭되었다.

국가 교육 개혁 시작 - 재단 설립 및 역사 변경

철강업계의 거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앤드류 카네기 (Andrew Carnegie)의 재산은 사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을 전국으로 운송하는 철도에서 시작되었고, 안정적이고 수익성이 높은 석유 판매를 제공하는 오일 크릭 근처의 부동산에 대한 수지맞은 투자로 크게 확대되었다.

1905년, 록펠러는 카네기와 그의 임명자들이 미국의 교육 시스템 개발을 지휘할 수 있는 비과세 재단인 교육 진흥 카네기 재단 (Carnegie Foundation)을 설립했다. 1910년, 록펠러는 그의 자선적 야망을 위해 세금이 면제되는 비과세 산하기관인 록펠러 재단(Rockfeller Foundation)을 설립하고 카네기 교육 진흥 재단의 뒤를 잇도록 했다.

1950년대 비과세 재단의 활동에 대해 조사하는 의회 위원회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교육 진흥을 위한 카네기 재단은 자신들의 이미지 그대로,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공동의 열망에 협력하자는 제안을 가지고 록펠러 재단에 접근했다.

카네기 재단의 이사회 회의록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의회 위원회 연구 책임자인 노먼 도드 (Notman Dodd)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카네기 재단은 한 가지 제안을 가지고 록펠러 재단에 접근한다:

'국내 교육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은 록펠러 재단에 의해 다뤄져야 하고, 국제적 교육 부분은 기금에 의해 다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두 가지 작전의 성공 열쇠는 미국 역사 교육의 변경에 있다고 결정한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당시 가장 유명한 미국사 교사였던 찰스나 메리 버드와 같은 4명의 교사들에게 접근한다. 그들의 제안은 "우리가 제시하는 주제로 교습 내용을 바꿀 수 있는가" 였으며 돌아오는 교사들의 대답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 후, 그들은 "교습 방식이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우리만의 든든한 방어막 자체를 건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하며 펠로우쉽을 전문으로 하는 구겐하임 재단에 접근했다. "우리가 미국 역사학 박사 학위 과정에 있는 젊은이들을 적임자로 채택해서 일을 꾸리면 우리와 협력한 대가로 그들에게 펠로우쉽을 줄 수 있는가요?"라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Yes"

그렇게 그들은 조건 하에 20명의 잠재적인 미국 역사 교사들을 런던으로 데려가고 그들에게 일을 수행하게 될 경우 어떤 보상을 받을지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브리핑 받는다.

20명의 역사학자들이 모인 그 그룹은 결국 미국역사협회(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의 핵이 된다. 이 나라가 미래에 기대하는 바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우리 역사를 열심히 연구하라는 명목으로 미국 역사 협회는 총 40만 달러를 기부받았다.

그렇게 그들의 연구는 7권의 연구로 절정을 이루는데, 마지막 권의 본질은 이것이다: "이 나라의 미래는 미국 특유의 능률로 관리되는 집단주의에 속한다."

의료 개혁

자연 요법 ➝ 서양식 의료 (수술, 입원, 방사선, 의약품 판매)

이러한 변화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진 가운데, 록펠러 재단과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단체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야심찬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그것은 바로 의료 행위 시스템의 변화였다.

의료 개혁은 사회 시스템의 대대적 변화에 줄곧 자금을 대던 석유재벌들이 여느 때처럼 엄청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던 분야이기 때문에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던 변화였다.

존 D 록펠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아버지 "악마 빌"에서 힌트를 얻었다. 악마 빌이었던 윌리엄 록펠러가 자신의 뱀기름 브랜드를 "Nujol"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착안하여 스탠더드 오일은 자회사인 Stanco를 통해 설사약인 "Nujol"을 출시했다. 스탠더드 오일의 부산물에서 파생된 살충제인 'Flit'과 같은 건물에서 제조된 "Nujol"은 시중 약국에서 6온스 병당 28센트에 판매되고 있었는데 스탠더드 오일의 "Nujol" 제조 비용은 1/5센트도 채 되지 않았다. 최소 원가의 140배 이상의 소비가격을 책정한 것이다. 이처럼 건강을 내세워 큰 이윤을 챙길 수 있는 "화학 의료약품"은 석유재벌들에게 큰 돈벌이가 되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지만, 여전히 21세기 초 미국에서는 자연 요법과 약초 요법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그들의 의약품 판매는 아무런 성과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석유재벌정권은 이 시스템을 전적으로 바꾸기 위해

세기의 전환을 꾀하는 의료 개혁을 시작했다.

1901년 존 D 록펠러는 록펠러 의학 연구소(Rockefeller Institute for Medical Research)를 설립했다. 연구소 소장으로는 펜실베니아 대학의 병리학 교수인 사이먼 플렉스너(Simon Flexner)를 영입했다. 그의 형인 아브라함 플렉스너(Abraham Flexner)는 '미국 의학 교육 시스템의 상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카네기 재단과 계약을 맺은 교육자였다. 미국 의학 교육 확대를 위한 아브라함의 플렉스너 보고서 (The Flexner Report)는, 록펠러 재단과 카네기 재단이 그 후로 몇 년 동안 의학 연구에 쏟아부은 수억 달러함께 미국 의료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자연 요법 및 동종 요법 의학, 특허가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자연 요법과 치료법에 중점을 둔 의료는 돌팔이로 치부되었고, 고가의 의료 절차와 긴 입원 기간을 필요로 하는 약물 기반의 대증요법만이 오직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카네기, 모건, 록펠러 측은 모두 본인들의 재산을 '수술, 방사선, 합성 의약품'에 투자했으며 이것은 새로운 현대 의료 시스템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의료 산업의 인수는 의과 대학들의 인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록펠러와 카네기는 대학에 가서 "우리가 자금을 대겠습니다"라고 말했고, 그들과 협력하기로 동의한 학교에 엄청난 액수의 자금을 제공했다. 그들은 학교들 측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모든 돈을 당신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돈이 현명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기 위해 우리의 몇몇 사람들을 학교 이사회에 투입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까요?" 거의 하룻밤 사이에 모든 주요 대학들이 이들로부터 많은 보조금을 받았고 또한 이사회 측에 이들이 언급한 사람들을 앉히는 것을 ㅡ한 명, 두 명 또는 세 명ㅡ받아들였다. 말 그대로 '학교'는 자금 마련을 위한 재정적 이해 관계에 의해 이들에 의해 인수되었다.

그 결과 학교는 돈을 받고, 새 건물을 지을 수 있었고, 실험실에 값비싼 장비를 추가할 수 있었고, 최고의 교사를 고용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모든 교육 체계를 화학 의약품 방향으로 짜야했다. 그것이 석유재벌들이 역이용한 자선 활동의 효율성이었다.

역사상 그 시점부터 의사들은 '약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의 모든 훌륭한 고등 교육 기관들은 약학계에 관심이 사로잡혔다. 자연 요법에서 한 순간 현대의 서양식 의료 체계를 구축하는 데 얼마나 적은 자금이 들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의료산업 설계 ➝ 석유 화학 기반의 제약·화학 산업 부흥

그렇게 석유재벌정권은, 자체 연구 센터에서 전체 의료 산업을 탄생시킨 다음, 자체 석유 화학 회사에서 탄생시킨 자체 화학 제품을 "치료제"로서 판매했다.

스탠더드 오일의 뉴저지 지부(Standard Oil of New Jersey)의 경영자인 프랭크 하워드(Frank Howard)는 알프레드 슬론(Alfred Sloan)과 Charles Kettering(찰스 케터링)이 그들의 재산을 암 센터에 기부하도록 설득했고, 그 후 암 센터는 그들의 이름이 붙여져 슬론-케터링(Sloan-Kettering)이 되었다.

프랭크 하워드는 록펠러 연구소의 병리학자인 코넬리우스 로드(Cornelius Rhoads)를 슬론-케터링 암 센터의 연구 책임자로 임명하여 미 육군의 머스터드 가스에 대한 전시 연구를 새로운 암 치료법으로 발전시키도록 했다. 코넬리우스 로드의 지도 아래, 화학전 서비스(Chemical Warfare Service)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은 SKI 약물 개발 프로그램으로 개혁되었고, 직원들은 머스터드 가스를 화학 요법으로 전환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록펠러 소유의 뱀 기름이 암 치료제로 팔리고 있었다.

💊🧪석유 + 제약 및 화학

급성장하는 제약 산업에 대한 석유재벌정권의 관심은 20세기 초 독일에서 형성된 IG 파르벤(I.G. Farben)과 같은 제약 및 화학 카르텔 회사들로 모아졌다. 1930년대에 Royal Dutch의 버나드는 IG 파르벤 자회사의 이사회에서 일했고, IG 파르벤은 스탠더드 오일과 협력하여 새로운 카르텔을 설립했다. 이는 스탠더드 오일 사장인 월터 티글(Walter Teagle)과 Loeb & Co과 Kuhn의 폴 워버그(Paul Warburg)를 포함하여 로스차일드의 브로커 가문인 제이콥 쉬프(Jacob Schiff)가 이끌고 있었다. 전성기에 IG 파르벤은 세계에서 가장 큰 화학 회사이자 뉴저지의 스탠더드 오일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산업 기업이었다.

IG 파르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해체되었지만 스탠더드 오일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부분이 현재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파르벤의 화학 부문 중 하나인 BASF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화학 기업으로 남아있으며, 파르벤의 제약 부문으로 남은 바이엘(Bayer)과 사노피(Sanofi)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제약 회사들 중 하나이다.

매캐한 독성 연기를 뿜어내며 가열차게 굴러가는 철강의 기계와 연료들이 가득 들어찬 화학 공장을 방문해 본적이 있는가.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외견으로 보이는 화학 공장들은 눈쌀을 한껏 찌푸리게 한다.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섭취하고 흡수하는 모든 의약품과 보조제들의 탄생 장소이다. 과연 인체와 결이 맞겠는가.

치료로 제시되는 약품이 오히려 질병을 야기하고 인체 내 시스템을 무너뜨리기에 인간은 병원과 치료의 무한 피드백에 갇힐 수 있게 되고, 그들은 무한한 부를 창출할 수 있게 된다. 덧붙여 의료 보험이라는 족쇄에 옭매일 명분과 바탕이 마련된다. 세계를 굴리는 엘리트들에게 든든한 자금줄을 제공하는 가장 큰 기업류 중 하나가 바로 제약사와 보험사가 아니겠는가.

경제 개혁

미국 재정 장악 - 연방준비은행 설립 및 은행 산업

석유재벌정권은 단순히 교육과 의학 분야를 독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석유경제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뜻으로 뭉쳐 미국 재정까지 완전히 장악하려 했다.

1910년,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장인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

내셔널 시티 은행의 프랭크 밴더립 의원 폴 워버그 의원,

J.P. 모건의 여러 요원들은

조지아 해안의 작은 섬에서 극비리에 만났다. 그들의 계획은 미국의 재정구조를 파괴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이 되기 위해,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대통령직에 밀어넣었다; 1913년 우드로 윌슨은 연방 준비법과 연방 소득세를 법으로 통과시켰다. 1913년에 그렇게 설립된 연방준비제도(Federeal Reserve System)는 스탠더드 오일의 사장이자 미국 IG 이사인 월터 티글(Walter Teagle)을 포함해 석유재벌들과 은행 관계자들이 직접 뽑은 지명자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1921년, 국제 은행들은 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대외 관계 위원회)를 설립했고, 미국 정부는 CFR의 재무 및 외교 업무 경험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였다. 1941년, 그들의 연구 단체 중 하나인 '전쟁 후 외교 정책 자문 위원회(Advisory Committee on Post-War Foreign Policy)'는 현 국무부(State Department)의 일부가 되었다. 이 연구 그룹의 비밀 목표는 '의회'를 조건부로 하는 것이었고, 이 나라 국민들이 '유엔'의 설립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1945년에 시작된 유엔(UN, United Nations, 국제 연합)은 세계 평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 이것은 현재 '신세계 질서' 내지는 '그레이트 리셋'으로 불리는 단일 세계 정부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CFR은, 라운드 테이블 기구(Roundt Table Organization)의 자회사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영국의 엘리트주의자들의 모임이다 – 로스차일드(Rothschild)는 1776년부터 세계 행사를 통제해 왔고, 이제 그들을 통제 하에 두고 단일 세계 정부를 수립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글로벌리스트들은 세계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나라를 운영하는 돈을 통제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고, 대통령을 죽일 수 있다. 그들은 석유를 차단하고 세계를 전쟁에 빠뜨릴 수 있다. 아무리 극비리에 운영되지만, 그들의 목표는 2,000년 이상 알려져 왔다. 이것이 바로 현대 신세계 질서의 서막이다.

다시 록펠러로 돌아와서, 록펠러 가문은 존 D 록펠러의 형의 손자인 제임스 스틸먼 록펠러(James Stillman Rockefeller)가 내셔널 시티 은행(National City Bank)의 이사로 임명된 1950년대부터 정식으로 은행 업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존 D 록펠러의 친손자인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feller)는 스탠더드 오일 제국의 오랜 은행 파트너인 체이스 맨하탄 은행(Chase Manhattan Bank)을 인수했다.

록펠러 부부의 은행 관련 움직임은 그들의 동료 석유왕가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반영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그들의 석유 이익으로 그들의 은행 재산을 보충한 반면, 록펠러 가문은 그들의 석유 재산을 은행 이익으로 보충했다.

식량 개혁

녹색 혁명 - 유전자조작 종자 카르텔 창설 및 화학 비료 산업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독점권을 통합함에 따라 성공에서 성공으로 도약하면서 석유재벌들의 야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번에 그들의 목표는 세계 자체의 식량 공급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고, 다시 한번 그들은 자선 사업을 그들의 사업 인수의 위장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

앞서 포스팅한 GMO 이야기의 개괄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었다.

"녹색 혁명"은 1943년 식물 유전학자 노만 볼로그(Norman Borlaug)와 연구팀이 멕시코 땅에 도착했을 때 시작되었다. 그의 목표는 농업 기술과 생명공학 방법론을 향상시켜 기아를 완화하고 개발도상국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유전적으로 변형된 밀, 부자, 옥수수, 그리고 다른 작물들을 만들면서, 노만 볼로그는 세계의 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계획을 세웠다. 희망은 이러한 새로운 농작물과 농업 기술이 제3세계 국가들을 기아 직전의 상황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희망이 현실이 되었다. 빈곤에 시달리는 국가에 가져온 농업 혁신은 농부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기술과 자원을 제공했다. 이것은 한 때 투쟁했던 나라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시켰다. 농산물 수출은 양과 다양성이 급증하여 국가가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제공한 유전자 변형 GMO 작물이 번성함에 따라 농부들은 증가된 수입을 사용하여 더 새롭고 우수한 농기계를 구입할 수 있었고, 이러한 수입 증가는 농업을 더 쉽고, 더 안정적이고, 더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녹색 혁명은 농업의 현대화를 가져왔고 세계에 깊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 멕시코 정부는 농업을 통해 멕시코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록펠러 재단에 의지하기 까지 했다.

허나 희망으로 둔갑된 불씨는 역시나 재앙의 불씨였다. 노먼 볼로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록펠러 재단의 연구원이었고, "녹색 혁명"은 그것이 초래한 수확량 증가에 상관없이 석유재벌들의 이익을 위한 새로운 석유 화학 비료 산업 시장을 창출했으며, 아처 다니엘스 미단(Archer Daniels Midand), 번지(Bunge), 카길(Cargill), 루이 드류(Louis Dreyfus) 등의 "ABCD" 종자 카르텔을 낳았다.

이 종자 회사들은 식품 포장 및 가공 산업에 대한 관련 이해 관계와 함께 록펠러 재단의 와실리 레온티프(Wassily Leontief)가 수행한 연구의 도움으로 1950년대 Harvard Business School에서 개발한 개념인 미국 "기업식 농업"의 핵심을 형성했다.

미국의 거대 농업 기업들은 공통의 목표를 공유했다. 3세계 농업을 그들의 상품에 대한 포로 시장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까지 록펠러 스탠더드 오일 네트워크와 질소 비료 산업(듀폰트, 다우 케미칼, 헤라클레스 파우더 포함)의 동료들이 전 세계 시장에 진출했고, 시장은 존슨 대통령의 "평화를 위한 식량" 계획에 따라 미국 정부에 의해 편리하게 개방되었다. "평화를 위한 식량"은 석유화학에 의존하는 농업 기술(비료, 트랙터, 관개 등)을 녹색 혁명의 원조 수혜자들에게 의무화한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 그 자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이 "녹색 혁명"의 가난한 제3세계 "수혜자들"은 록펠러의 자체 체이스 맨해튼 은행이 관리하고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세계 은행과 국제 통화 기금의 대출에 의존해야 했다. 이러한 부채로 조달된 석유화학제품에 의존하는 농경 기술 강요는, 녹색 혁명이 집권한 후, 토지 개혁과 고리대금 폐지가 정치적 의제에서 제외된 인도와 같은 국가에서는 부유한 지주 계급과 토지가 없는 농민 사이의 차이를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되었다.

혁명의 주요 성공인 농산물 수확량 증가도 사실 과대 포장되어 있었다. 인도 전역의 수확량 성장은 실제로 기업식 농업이 도입된 후 둔화되었고, 환경 파괴는 훨씬 더 파괴적이고 치명적으로 진행되었다.

Current Science 2000년 12월호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녹색 혁명은 생산성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토지의 고갈, 토양 비옥함, 토양 염화, 토양 침식, 환경 악화, 건강 위험, 지속 가능성 저하와 같은 여러 부정적인 생태학적 결과도 낳았다. 환경 악화, 건강 위험, 농지의 지속 가능성 열악, 생물 다양성 악화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 관개 및 불균형 시비로 인해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

유전자 혁명 - 유전자변형 종자로 전 세계 식량 공급 독점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은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새로운 계획을 창출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자금을 지원한 녹색 혁명에 대한 비판을 수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단은 계속해서 연구 자금을 지원하고 목표 시장에서 기업식 농업 투자에 대한 전망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러나 녹색 혁명이 그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행보는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끔찍하고 야심 찬 프로젝트인 '유전자 혁명'의 서곡에 불과했다. 이 식량 개혁 프로젝트의 목표는 전 세계적으로 농업 기술과 화학 물질을 독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의 천연 종자를 모두 특허 받을 수 있는 유전자 변형 작물로 대체하여 식량 공급 자체를 독점하는 것이다.

이 유전자 혁명에 관련된 참가자는 녹색 혁명의 참가자와 거의 동일하다. IG 파르벤에서 파생된 바이엘 크롭사이언스(Bayer CropScience) 및 BASF 식물 과학(BASF PlantScience)은 록펠러 재단의 자금을 지원받고, 포드 재단,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그리고 같은 생각을 가진 자선단체들의 전통적인 석유 관련 회사들의 자금을 지원받는 석유재벌 협력 회사인 다우 아그로사이언스(Dow AgroScience), 듀퐁 생명공학(DuPont Biotechnology), 몬산토(Monsanto)와 어울린다.

기업, "자선단체", 정부 및 전 세계 GM(Gene Modified, 유전자조작)작물 홍보에 대한 정부 간의 이해의 수렴은, 해당 사례에 전념하는 연구 기관, 산업 협회 및 "자선 단체"의 의아한 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록펠러가 후원하는 국제 쌀 연구소(IRRI), 록펠러/몬산토/USAID의 아이디어인 농업생명기술 애플리케이션 인수를 위한 국제 서비스(ISAA), 록펠러/포드/세계은행이 설립한 국제농업연구협의회(CGI), 그 밖의 무수한 브랜드 기업 등 "농업 기술"을 내건 호의적으로 들리는 모든 단체들은 전 세계 시장에서 GM 작물을 연구하고 홍보하며 결국 그 이익은 모두 석유재벌정권의 금고로 귀결된다.

이 이야기의 대표적인 예는 아르헨티나의 농업 기업 신식민화이다. 몬산토는 그 당시 이미 재배되고 있던 작물에 로열티를 요구하기 전에 그 나라가 유전적으로 변형된 Roundup Ready 콩에 빠져들게 하기 위해 정교한 "미끼와 스위치"를 실행했다. 듀퐁(Dupon)은 그 후 자신들의 GM 콩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이기 위해 관대하게 "생명을 위한 단백질"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식량 원조"를 통해 카르텔이 개발한 GM 작물이 신흥 경제국에 집중되는 동일한 장면이 국가마다 나타나고 있는데, 보통 이들 국가들이 특히 취약한 기근의 시기에 그러하다. 잠비아나 앙골라와 같은 소수의 국가만이 농업 카르텔의 이익을 위해 미국 정부가 관대하게 지원하는 이러한 GMO 식품 공급 인수를 완전히 거부했다.

결론: 독점

초기 석유 산업의 맹렬한 개척자부터 마키아벨리의 사회 공학자 및 지정학 계획가에 이르기까지, 석유재벌정권은 "악마 빌"의 뱀 기름 만병통치약 시대 이후로 많은 발전을 해왔다. 악마 빌이 대중을 속이기 위해 온갖 형태의 기만과 속임수를 사용한 것은 존 D 록펠러와 나머지 석유재벌들이 어떻게 그들의 사업을 구축했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한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록펠러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 영국 왕실, 네덜란드 왕실 등 석유 산업을 건설한 강력한 카르텔들은 더 이상 석유에 관한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해졌다. 교통, 교육, 의료, 화폐 경제 시스템, 식량 공급 그 자체의 인수는 그들의 목표가 단순한 석유 독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큰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독점하려는 추구였음을 알게 한다. 사회의 모든 측면에 대한 완벽한 통제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그들의 권력에 대항하는 경쟁의 위협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며 더 큰 부와 권력을 일으키는 신생 분야 독점을 진취한다.

지난 세기 동안 그들의 행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성공적이었다. 석유에서 가스 펌프, 농장에서 식탁, 병원에서 제약, 드릴 장비에서 달러 화폐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서 그들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측면은 거의 없다.

석유재벌정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그들의 다음 프로젝트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비열하고 끔찍하고 야심적이다.

그것은 더 이상 석유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돈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 자체의 독점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이 인수를 위한 길을 준비하는 데 수십 년을 보냈고 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위해 엄청난 자원을 모아왔다.

그리고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석유재벌들이 오래 전에 완성하고 버린, 후에 결국 다시 그들의 손에 넘어갈 껍데기 게임을 여전히 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숨쉬며 소비하는 거의 모든 돈은 결국 그들에게 귀결되는 시스템이며, 생존을 위한 직업적 노동 역시 결국 모두 그들의 시스템을 뒷받침할 뿐이다. 우리는 화합을 통해 그들을 결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매트릭스에 순종하며 서로 경쟁하고 평가하고 위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가. 그들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비약적 계몽으로 이 시스템의 현실을 직시한 대중의 결집된 힘이다. 따라서 그들은 가열차게 분류하고 분리하고 매수하여 불화를 조장하며, 끊임없이 허위정보와 역정보를 생산하여 오도와 은폐를 일삼는다. 공교육과 언론은 대중의 눈을 가리는 데 가장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다. 공교육과 언론으로부터 형성된 공통된 지식(?)을 통해 우리는 뒤틀린 현실 세계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며 그야말로 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교통, 교육, 의료 개혁에 이어 2021년, 현재 우리는 식량 개혁과 함께 인류 개혁 역사의 서사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식은 그 자체로 인체로 직결되며 우리 삶의 존재의 이유이다. 기술과 제도라는 미명 하에 우리는 인체와 삶 자체를 강탈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그들의 이익과 권력만 마구잡이로 부풀리는 매캐한 각종 기술 공학이 지난 세기에 걸쳐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인류의 삶 전반에 고루 스며들고 있으며, 동시에 '인간'을 '인간의 삶'을 그리고 '인간성'을 통째로 변모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악마 빌의 기만과 배반이 쌓아올린 세상이다.

현실주의는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 이상의 실현을 기다리는 태도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사회 개혁 역사의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음을, 아니 더 나아가 그들이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절정의 서사를 겪을 대상이 바로 우리임을..가열차게 필사적으로 직시해야만 할 것이다.

'사회'라는 미명 하에 축조된 거대한 시스템 내에서

오늘도 우리는 열심히 그들의 자본을 순환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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