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트릭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드는 능력, 마술.

대부분의 위대한 마술사들은 인간 심리의 예민한 관찰자이며, 마술의 루틴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인지적 편견을 약탈하기 위해 능숙하게 배열된 일련의 기술들로 구성된다.

엉뚱한 상상력과 교묘한 속임수를 화려히 펼쳐내는 '무대 기교의 대가들'이 자못 인상적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 '사회 기교의 대가들'이 매일을 수행하는 사회적 조작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피라미에 불과하다.

여기 '계엄령'이 그 좋은 예가 되어준다. 자유 민주주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조작된 착각을 지닌 대중들은 앞으로 침투하게 될 갖은 계엄령 가락에 마음을 내어주어 빅 브라더의 언덕 위로 줄달음하게 될 것이니, 의료계엄령의 남용이 가장 심했던 지난 2년간의 사이비 플랜데믹에 대한 대중들의 환호가 바로 이에 대한 근거로 작용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존재에 대한 믿음을 발생시키고 이를 두려워하도록 만들기 위해 모든 사회적 요소가 하나의 거대한 팬데믹 캠페인을 협력적으로 구축했고, 그 사회적 환경에 감각을 모조리 탈취당한 대다수의 군중은 계엄령에 대한 실질적 경고를 '음모론'이라 비난하며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는 COVID-1984의 경찰 국가들에 다함없는 갈채를 보냈다.

집단을 이끄는 통치자들은 항상 존재해 왔고 인구 집단의 규모가 불어날수록 강화될 필요가 있는 통제력은 결국 더 많은 약자들의 희생과 부패를 디딤돌 삼을 수 밖에 없다. 절대 권좌에 오르게 된 군주들이 대량 인구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할수록 피지배층들은 하릴없이 인식의 수동적 단일화를 반대급부로 집어 삼킨다. 그렇게 인구 규모의 확장과 통치의 강화가 합일되는 시대 즈음에 결국 민중은 노예에 이른 저들의 상태를 노예라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도리어 그 상태에 일신을 파묻고 안락을 꾀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21세기, 바로 그 시대가 눈 앞에 이르렀다.

공유되는 인식의 거미줄이 떠받치는 사회적 프레임 안에서 희노애락의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마치 전체를 살고 있다 착각하는 개인들은, 실제로 전체인 양 하는 그 사회가 설계된 사회 공학의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파생시킬 겨를 조차 없이 삶의 모든 순간이 가두리의 그물코에 촘촘히 성긴다. 그렇게 형성된 인지 회로의 인력은 그 세기가 얼마나 강한지 돔 밖의 세상이 얼마나 푸르른지 탐험하고자 하는 본능적 호기심과 욕구의 씨알까지 완전히 억눌러 버린다.

그칠 줄 모르는 욕구들이 인류의 평온에 반하는 정책에 민중을 적극 참여시키는 능력은 일종의 '마술 트릭'과도 같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미친 짓으로 여겨졌던 아이디어와 행동들에 대해 절대적 신뢰를 창조하기 위해 시스템을 재구성하고 군사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는 사회 마술사들의 능력은 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하지만, 실제로 이 환상의 근본적 실체는 여타의 다른 마술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권력의 망토를 휘두르고 사회라는 무대에 우뚝 선 이 마술사들은 글로벌 의제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이며 어떤 주문을 사용하는 것일까.

마술을 위한 퍼포먼스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마술사들은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유형의 잔기술에 의존한다. 잔망스런 손놀림이든, 재치있는 화술이든, 간드러지는 연기이든, 아름다운 조수이든, 잘 훈련된 패턴의 흐름이든, 그들은 의도한 마술이 성공적으로 낙착되도록 다양한 트릭을 개입시키는 데 아주 훌륭한 대가들이다.

청중의 오감을 혼란시켜 자칫 어설퍼질 수 있는 마술을 환상적으로 승화시키는 마술사들은 심리를 활용하는 데도 매우 능하다. 실질적으로 심리를 활용한 마술의 한 분야인 멘탈리즘 트릭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특정한 응답을 유도하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간단할 수도 있고, 미리 결정된 특정한 응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일련의 제안들을 세심하게 심어나가는 것처럼 복잡할 수도 있다.

위에서 보이는 사진은 푸틴에 집착하는 어느 미치광이의 블로그가 아니다. 유럽이 러시아의 석유 및 가스 자원을 완전히 거부하고 세계에 평화와 조화를 드리움으로써 어떻게 "푸틴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보고서인 <Switch Off Putin>을 홍보하기 위해 설립된 웹사이트 switchoffputin.org의 메인 이미지이다.

알다시피, 신세계 질서의 설계자들에게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빅 오일 버전의 "환경주의" 즉, "지구의 대자연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시행하는 에너지 배급과 자원 제한의 테크노크라시 시스템이 쓰레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매년 시행되는 여론 조사에 따르면, 기후 재난에 대한 두려움을 심기 위해 고안된 전례 없는 52년 간의 셀 수 없는 선전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지구 온난화의 위협은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가장 낮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구의 대재앙을 막기 위해선 날씨의 신을 달래야 한다는 지구 온난화 미신을 창조한 매직 군주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전 세계 앨 고어들에게 탄소 면죄부를 지불하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탄소 배출권과 에너지 배급, 기후 봉쇄 및 하향식 신봉건 통제의 다른 모든 요소들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을 불피우고 군주들이 원하는 정답에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멘탈리즘 트릭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사회를 잠식시켰던 팬데믹 공포 캠페인은 앞으로 일어날 기후 의제를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지렛대로 지난 2년 여간 그들이 원하는 '실존적 위협'을 달성하기 위해 펼쳐낸 일련의 멘탈리즘 플랜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대중들은 여지없이 '기후 위기'를 '팬데믹 위기'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아는가. 인류와 지구의 존재 자체를 위기로 만들면 다양한 구제책을 명목으로 인류의 삶 전반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관제적 개입이 가능해 진다는 것을. COVID-19의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구한다는 구실로 실행된 통제 방역책을 충실히 이행하고 훈련받은 덕에 전 세계 대중들은 앞으로 이에 상응하는 기후 봉쇄와 같은 긴급 조치에도 수월히 순응할 수 있게 되었다.

2년 여간 훌륭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팬데믹 장치는 이제 그 걸쇠를 살포시 걸어 잠그고 있다. 백신 부작용과 변이 바이러스라는 잇닿은 잔망스런 트릭에도 불구하고, 그칠 줄 모르는 장기간의 코로나 히스테리로 사람들이 공포심을 느끼기는 커녕 동일한 자극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니 바야흐로 팬데믹 트릭은 휴지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그렇게 2022년, 전염병 '공포'에 내성이 생긴 대중들을 글로벌 어젠다에 적극 참여시키기 위해 새로운 자극제가 출몰하게 된다.

그들은 철저히 대중의 "감정"을 이용한다. 동일한 감정이 반복 자극되면 흥미가 상실되고 고루해짐에 따라, 팬데믹 기간 동안 대중의 공포심을 자극시켜 윤활유로 활용한 마술사들은 현재 정의에 찬 대중의 분노를 윤활유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러시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푸틴을 제거하고 싶은 대중의 "Switch Off Putin" 욕망이 기술 관료 엘리트들에 의한 엄격한 에너지 통제와 자원 배급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테크노크라시의 강력한 동기 부여로 작용하고 있음을 목도 중에 있다.

지속 가능한 미래와 환경 주의를 내세우며 실현되고 있는 '전 지구 자원의 소유권 쟁취'와 자원과 자본 분배를 통한 '인류의 온전한 통제'를 가능토록 하는 [테크노크라시]'팬데믹 - 기후 변화 - 러시아 푸틴 포비아'라는 일련의 훌륭한 시나리오 전개를 바탕으로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매우 속도감 있게 순차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현재 "Switch Off Putin" 캠페인의 배후에 있는 팀은 모든 러시아 석유와 가스 수입에 대한 유럽 전역의 즉각적인 보이콧을 옹호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자원의 전면 금지는 불가능하다고 무시되어 왔지만 이 보고서의 저자들은 긴급 조치가 시행되고 경제 전체가 전쟁 발판으로 놓이게 되면 결국 달성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주장한다.

보고서의 '유럽의 전쟁 경제'라는 제목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이러한 감축을 달성하려면 유럽 내에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의 협력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유럽 경제가 에너지 전환의 신속성 측면에서 현재 전쟁 상태에 있다는 명시적인 정치적 인식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변화의 속도는 COVID-19 봉쇄와 유사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다른 궤도를 지닐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것들이 달성되는 데 있어 어떠한 혼란도 생기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간다.

공정한 분배를 통한 배급만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정부는 모든 사람이 기본 금액을 받고 지불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단순히 차단되지 않도록 가계 수준에서 가격 상한제와 보장된 최소 공급을 도입해야 합니다. 온도 조절 장치를 끄는 것은 의무화하고 시행하기 어려울 테지만 가구당 허용되는 가스의 양만 있으면 이를 고수할 인센티브가 상당할 것입니다. COVID-19 봉쇄와 마찬가지로 국가적 제한을 준수하라는 사회적 압력도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글로벌 의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당대의 가장 큰 이슈들을 노골적으로 조작하고 있다는 것은 심지어 숨겨져 있지 조차 않다. 아니, 대중들에게 이 값싼 무대를 속임수를 쓰고 있는 마술사들은 공개적으로 그를 자랑하기 까지 한다. 예를 들어, 워싱턴 포스트는 유엔의 IPCC가 발명한 "기후 위기"를 현재의 지정학적 위기와 명시적으로 연관시키고, 그 미약한 연결은 탐탁치 않은 글로벌 의제를 재포장하는 편리한 방법일 뿐이라고 시인하는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어렴풋이 남은 유일한 희망은 푸틴이 의도치 않게 그러한 글로벌 추구[100% 재생 에너지로 전환]의 정치를 단순화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유권자를 설득하려면 겨울에 더 춥게 자는 것부터 비행기를 더 적게 타고 소비를 위해 더 많이 지불하는 것까지 '희생의 필요성'을 전달해야 합니다. 이제 정치인들은 '러시아의 침략'과 '기후 변화'라는 두 가지 구길을 기반으로 이러한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봉건주의의 오래된 열망을 재구성하려는 최근의 시도들은 무척이나 조잡해 보이지만 매우 분명한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 'Switch Off Putin' 캠페인은 자체 여론 조사 시행 결과, 약 70%에 해당하는 유럽 인구가 러시아의 석유 및 가스를 보이콧하여 푸틴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의견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이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 사항까지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가디언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제공한다.

40% 이상의 사람들이 수요를 관리하기 위해 에너지 배급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고, 52.7%는 우크라이나 수출에 대한 수요를 줄이기 위해 육류를 덜 섭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식의 유수가 이대로 흘러 간다면, 클라우스 슈밥과 그의 측근들이 관찰한 것처럼 사람들은 결국 벌레를 먹게 되고 에너지를 분배받게 될 것이며 저들의 노예 상태를 좋아하게 될 것이 아닌가.

글로벌 어젠다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발현시킨 최악의 승수는 바로 '대중'이라는 아군은 얻었다는 것이다. 실험적 의료 개입에 참여하지 않은 죄를 대가로 격리와 비난을 옹호했던, 진실을 허위 정보라며 적극 신고에 참여했던 미디어의 최면에 영혼을 빼앗긴 무리들이 이제는 우크라이나 깃발을 흔들어 보이며 러시아를 증오하고 기술 관료들의 에너지 소유권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며 에너지 자원 배급에 적극 옹호하고 나선다. 신봉건주의 영주들의 플랜에 열렬히 YES 깃발을 흔들며 노예를 자처하는 꼴이 아닐 수 없다.

구(舊)봉건주의가 육체적 수탈을 기반으로 노예 부림을 했다면, 신(新)봉건주의는 정신의 온전한 탈취까지 감행하므로 노예가 미처 노예인지 자각 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맹목적 신봉에 따라 '자발적' 노동과 순종이 가능해진다. 심리 조작과 진보된 과학 기술의 향연으로 굳이 강압이라는 채찍 없이도 손 하나의 까딱질로 원하는 흐름을 펼칠 수 있게 된다.

구봉건시대 노예들의 눈물을 안타까히 여겼는가. 그들은 자신의 수탈에 기꺼이 아파하고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는 건실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현대의 노예들은 그 정신마저 탈취되어 저들의 노예 상태를 즐기고 있는 지경으로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화될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 개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혹은 부와 지위의 보상 내지는 보람을 느끼기 위해 저들의 일을 하고있다 말한다. 그럼 모두의 일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일까. 자신들이 가열차게 굴리는 이 쳇바퀴들이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지, 어디로 향하는지가 질문의 답이 되어야 한다. 과연 이 사회적 바퀴들은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며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목표로 매일을 그렇게 삐그덕대며 굴러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상기에서 설명한 이러한 유형의 속임수들은 기후 어젠다에 국한되지 않으며, 속기 쉬운 대중들을 더욱 잘 속일 수 있도록 오래된 아이디어를 재구성하는 문제도 아니다. 마술사 창고에 있는 모든 트릭 기술은 사회 공학자들에 의해 매일 사용되는 것으로 모두 미래의 글로벌 어젠다를 실행하기 위해 실험되는 주제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이 실행하는 가장 큰 멘탈리즘 트릭의 주제는 바로

"대중들이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실제로 이것만으로도 오늘날 매일같이 우리가 가열차게 굴리고 있는 이 사회 시스템이 향하고 있는 당장의 목적지를 이해하는 것이 충분하다. 일단 인류를 주체로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흐름을 전반적으로 헤아릴 수 있게 되면 앵무새같은 미디어와 거짓말하는 정치인, 글로벌리스트의 의제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의 조작을 알아차리는 일은 그다지 어렵게 된다.

마술 속임수의 트릭을 종알종알 설명해 대는 사람들에 의해, 마술사들의 쇼무대가 완전히 망쳐질 수 있는 것처럼 사회 공학자들의 트릭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중에게 보다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면, 최면에 걸린 대중들의 세뇌도 하나 둘 깨어지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만 대중들을 매트릭스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개입되는 자극적인 계략과 속임수는 끝이 없고 자본과 보상을 갉아먹고 사는 사람들의 적극적 선전 활동과 철저한 세뇌들이 사회의 일상과 평행을 이룸에 따라 트릭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과연 조작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대중들이 테크노크라시의 신봉건적 그레이트 리셋에 속아 넘어가 피동적 산물이 되기 이전에 모든 거짓말을 폭로하고 환상의 주문을 깨는 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이것이 당장에 인류가 직면한 실존적 질문이다. 대답이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마술 쇼를 마술 쇼로 인식하는 사람들만이 '환상'이라는 커튼을 거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느라 이따금씩 스파이크의 환상을 필요로 하는 대중들에게 선사되는 매일의 자극적인 뉴스 피드들이 실제로는 일상에 적당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주의를 분산시키고, 오도하기 위해 펼치는 '마술 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트릭의 실체를 알리고, 삶의 본질을 자의적으로 궁리토록 하고, 저 하늘과 바다와 초의 당연한 푸르름에서 안심을 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곧 현대인들의 임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편안한 마음이 곧 일상이 되면 굳이 자극이 필요로 되지 않는다. 생명과 환경의 어울림에서 오는 온유함은 행복, 기쁨, 사랑, 감사, 우월, 만족, 보람, 긴장, 슬픔, 우울, 분노 등의 단편적인 감정들에 갈증을 느끼도록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권태에 지쳐 혼란스럽고 불안한 삶들에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강력한 자극들이 주기적으로 수혈되어야 함으로 미디어 속 세상은 언제나 지칠 날이 없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차지하는 것은 실로 감정의 연쇄가 전부가 아닌가. 개인들은 다원화된 사회적 요소와 사회 심리적 힘들이 의해 시시로이 발현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꿰어나가며 인생의 매 순간을 꾸리고 있다. 원하는 감정을 취하고자 현재를 희생시키든, 당장에 그 감정을 충족하기 위해 현재를 내어주든 삶의 모든 순간이 지향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상태에서 발현될 감정의 획득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을 생명의 주체로 가름한다면 언어와 인식 이전에 명백히 '감정'이 우선된다. 인체의 감각들이 받아들이는 감정의 너울을 타고, 분절된 인체의 구조는 고도화된 지능과 결하며 소리의 구분과 언어를 파생시키고 인식을 생성했다. 사실상 생명체를 동하게 하는 것은 환경의 너울이 감각을 통해 스며들어 체내에서 발현되는 '감정'이 전부인 것을. 소통도 삶도 결국 감정의 유수를 건강히 흘리기 위함이 되어야 하지만, 뒤틀린 파편들이 감히 목적이 됨으로 그 과정에서 처참히 놀아나고 쓰임되는 감정들과 그에서 비롯되는 일신의 비쩍되는 건강들에 매일을 고개를 떨군다.

실제로 생명체는 '모든 순간' 다양한 감정의 파동을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다. 감정에 의해 관장되는 생명들이 서로를 관통하는 순간의 감정들을 보다 헤아려 집중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차마 말로는 담지 못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속으로 넌지시 품어보는 것은 어느덧 필자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지금, 당신의 감정은 어떠한가.'

더불어 사는 삶에서는 언어의 정당성보다 감정에 언어를 실어 고이 잘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즉 상대의 '언어'에 맞추어 대화하기 보다 상대의 '감정'에 맞추어 대화를 나누면 교류가 유려해진다는 것이다. 언어는 창조된 정의들의 무리진 인식 더미에 불과한 것으로, 언어의 합리적 의미에 집중함으로써 감정을 차선으로 배제시키는 '언어의 교류' 이전에 그렇게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는 '감정의 교류'에 집중하면 서로 아니 더 나아가 환경과의 유대까지 자연스레 꾀할 수 있게 되니, 결국 매순간 환경에서 파생된 감정의 너울들을 살고 있는 생명들이다 우리는.

오늘도 그리고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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