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가 세계를 정복한 이유 - 인구 감축 및 통제 - ①우생학 유전자공학 ②지구온난화 ③테크노크라시

      


이어지는 글로, 앞선 포스팅 선독 후 이번 게시물 정독을 권유합니다

      

20세기 초, 석유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제질서가 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20세기 말, 그 질서는 확고히 확립되었다. 난방, 교통, 산업 전력, 플라스틱 제조, 의약품 제조, 어떤 식으로든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현대 생활의 측면은 없었다.

그러나 스탠더드 오일의 록펠러, BP의 영국 왕실, 로열 더치 석유의 네덜란드 왕실, 로열 더치 쉘의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석유왕국의 통치자들은 단순한 재정적 지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들에 대한 완전한 독점과 함께 발생하는 권력은 엄청났고, 그들은 그 권력을 통해 세계를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로 재창조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앞서 [석유가 세계를 정복한 방법] 포스팅에서 보았듯이 석유재벌들의 영향력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교육 시스템에서 의료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녹색 혁명에서 유전자 혁명까지, 세계 대전에서 걸프 전쟁에 이르기까지, 오일 머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측면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1970년대 석유 달러가 상승하면서 심지어 국제 통화 시스템 자체도 석유에 의존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옛 질서인 석유 질서가 드디어 종말을 고하고 있는 듯 하다.

Amy Goodman: 우리는 지구 온난화를 부추기는 가스, 석유 및 석탄 등의 회사에 대한 투자를 철수하자는 캠페인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350.org의 전무이사인 May Boeve는 오늘 방송 직전에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습니다.

May Boeve: 우리는 오늘로써 총 매각 약정액이 3조 4천억 달러를 넘었음을 발표합니다.

출처: 새로운 이정표에 도달한 화석 연료 분배 운동 - 지금 민주주의!

Robert Dudley: 우리의 석유와 가스 부분의 생산 활동이 지구의 온실가스 배출에 기여를 하고있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OGCI [Oil and Gas Climate Initiative]가 설립된 이유입니다.

출처: OCGI는 혁신적인 저배출 기술에 투자한다.

내레이터 #1: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시작된 운동이 금융권의 초고층 빌딩까지 도달했습니다.

네레이터 #2: 전 세계적으로 거의 200개의 기관과 수천 명의 개인이 화석 연료에 투자된 총 500억 달러의 자산을 회수해 왔습니다.

매각 활동가: 만약 우리가 우리가 돈을 모아 태양광 패널과 같은 재생 에너지에 투자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2015년 세계 매각의 날

지구상에서 석유의 파괴적인 지배력을 확인한 대중들은 빅 오일(Big Oil)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축배를 들기 시작했다. "기후 변화로 인한 탄소 이후의 미래"라는 약속은 화석 연료 양산의 주범인 석유재벌들에게 종말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 석유 질서는 결코 석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석유재벌들의 관심은 더 이상 석유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통제(CONTROL)"에 관심을 지니고 있다.

사실, 석유, 가스 등과 같은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는 '탄소 절감의 새시대'를 계획하고 널리 퍼뜨린 사람들은 다름이 아닌 석유재벌들이었다. 그들의 힘이 오랫동안 그들에게 권력과 부를 가져다 준 상품에 대한 재정적 의존도를 훨씬 넘어서면서, 그들은 탄소 이후 시대를 향한 이러한 추진의 선두에 서 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통제력은 강화되고, 그들의 계획은 완성되고, 그들의 권력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너지에서부터 돈을 거쳐 유전자 자체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이 정밀하게 정렬되고 기술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이번 포스팅은 석유재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1부: 우생학의 부상

1963년,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Dhaka)'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다.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어떤 사람들은 길거리 웅덩이에 누워서 거리의 역겨운 정취를 가중시킨다.

그런데 갑자기 그 무리 속으로 한 인물이 발걸음을 내딛으며 등장한다. 드립드라이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껴안은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서 확연히 눈에 띈다. 현장을 둘러보던 멀끔한 사내는 함께 여행하는 동반자에게 고개를 휘저으며 말한다. "아..이게 문제란 말이야. 안그래?"

존 D 록펠러 3세 (John D. Rockefeller III) 1906 - 1978

그는 존 D 록펠러 3세 (John D. Rockefeller III, 또는 JDR3), 바로 앞선 포스팅에서 다뤘던 스탠더드 오일의 창립자 존 D의 손자이다. 록펠러는 다카와 다른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설립한 인구 위원회(Popultion Council)의 대표로서 그 임무에 접근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인구 위원회는 증가하는 인구 문제에 대한 의학 및 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간단한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이었지만, 실제로 인구 위원회는 어두운 역사와 지도 철학을 바탕으로 "인구 문제"와 궁극적인 "해결책"에 대한 록펠러의 진정한 관심을 포괄한 조직이었다.

존 D 록펠러 3세는 당시 록펠러 가문의 궤도에 있는 연구원들, 사업가들, 정치인들, 외교관들, 왕족들의 핵심 성좌로 알려져 있었으며, 자신의 엄청난 부와 권력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일찌감치 고안해 결정해 두고 있었다: 바로 지구상의 인구 통제

1934년 당시 28세의 JDR3는 아버지인 존 D 록펠러 주니어에게 다음과 같은 선언을 담은 편지를 썼다: "저는 록펠러 재단의 '출산 제한 및 인구 관련 문제'에 대한 연구가 적어도 현재 제가 집중해야 할 관심 분야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의 선언에서 인류를 향한 대장정의 서막이 열렸다.

JDR3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다. 증가하는 제3세계 인구의 위협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아시아로 록펠러 재단의 진상 조사를 의뢰한 후, 그는 회의 제목 그대로 "인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그 시대의 최고 의학 및 인구학 연구자들로 구성된 회의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 회의로부터 인구와 불임 연구 분야의 개발을 지도할 단체인 인구 위원회(Population Council)가 생겨나게 됐다. JDR3는 위원회를 설립하고 초기 운영 비용을 제공하기 위해 자신의 돈 135만 달러를 개인적으로 기부했다.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록펠러 3세 역시 자선 활동과 거창함을 자신의 진정한 의도인 통제를 위한 가면으로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가 조직의 진정한 목적을 드러내는 위원회 헌장의 초안을 작성했을 때 그 가면은 여지없이 벗겨졌다. 위원회의 헌창 초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태도, 습관, 환경의 변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를 촉진하고 현존하는 지식을 적용함으로써, 지능, 성격, 애정 면에서 평균 이상인 모든 사회적, 경제적 그룹 내의 부모들은 평균적인 가족들보다 더 많은 번식을 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의 전 외과의사이자 인구 위원회의 공동 설립자인 토마스 파란(Thomas Parran)은 사명 선언문에 이런 직설적인 입장을 담아내는 것에 조심스러워 하며, "그런 입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누가 '평균 이상의 애정'을 가진 부모들을 결정할 것인가? 또한, 누가 '평균보다 더 나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결정할 것인가? 솔직히, 이 헌장이 우생학적 함축을 의도했다는 것은 알지만, 이것은 나치의 위대한 인종 철학으로 쉽게 오해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단락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은 헌장의 최종 버전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 문장은 JDR3가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 우생학 운동의 중심 간행물인 <Eugenical News>의 뒷표지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가져다 복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우연 혹은 사고가 아니었다. 1957년 록펠러가 인구 위원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바로 연임된 첫 회장은 프레데릭 오스본(Frederick Osborn), 그는 미국 우생학회의 회장이기도 했다.

인구 위원회가 설립되었을 때 프레데릭 오스본이 지휘한 미국 우생학회는 공식적으로 인구 위원회 뉴욕 사무소로 운영을 옮겼으며, 현재 우생학 협회는 록펠러의 인구 위원회 보조금으로부터 직접 자금을 지원받고 있다.

인구 위원회는 다른 이름으로 우생학 학회였다.

"우생학 (Eugenics)", 이것이 바로 JDR3와 록펠러 가문의 "인류 자선 활동"에 대한 지도적 비전이었다. 인류주의라는 명목 하에 록펠러 가문과 그들의 동료 석유재벌들을 우월한 인류로 결착하는 사안은 세계 사건의 흐름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부와 권력을 지닌 자들에게는 여러모로 매우 적합한 비전이었다. 번식에 적합한 사람과, 유전자를 물려주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는 것.

우생학은 기본적으로 엘리트들 사이의 운동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열등한 계급, 인종 계급, 민족 계급이라고 여기는 것을 근절하기 위한 운동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층을 근절한 후에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유전 공학을 통해 그들 자신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그들이 그들 아래에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나머지 개체들은 근본적으로 그들을 전복시킬 힘을 갖지 못하는 수준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역사의 종말이 아닐 수 없다.

"우생학 (Eugenics)"은 본질적으로 잘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우생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프랜시스 갤튼(Francis Galton)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1850년대에 유행했던 여러 아이디어들을 혼합한 아이디어였다.

멘델(Mendel)로 거슬러 가보면, 멘델은 완두콩 식물의 유전적 특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특정한 특징들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과 이런 것들이 미리 결정되고 본질적으로 예측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동시에, "적자생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스펜서(Spencer)가 있었다. 그 역시 같은 종류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질의 이야기들이 그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는 한 종의 식물 또는 동물이 다른 식물이나 다른 동물들보다 더 적합하게 잘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종간에 유전적 특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다윈(Darwin)의 이야기도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다윈의 연구인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은 유전 물질이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결과를 보여주었고, 그들은 우생학의 관점에서 착안해서 이를 활용하려 했다.

요컨대 갤튼(Galton)의 우생학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모든 아이디어를 취하고 있었으며, 특히 패턴을 관찰하고 식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인간의 특성을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선택에 의해 우월한 인간을 낳을 수 있다는 본질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종과 세습'에 집착한 우생학자들은 '유전자'는 체중이나 키와 같은 신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지능이나 양심, 심지어 범죄와 같은 사회적 특성이라고 믿었다. 만약 당신이 가난하다면, 그것은 당신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범죄자라면, 그것은 당신의 가문이 범죄자 가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록펠러, 로스차일드, 왕족이라면, 당신의 가족이 부와 성공을 운명지었기 때문에 부유하고 성공한 것이다.

19세기의 우생학 철학의 사이비 과학적 특징이 다소 새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생각은 인류 문명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계층이 따로 있으며, 그들의 통치자들은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가족의 일원이라고 믿도록 배워왔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일본의 황제처럼 신의 후손이든, 유럽의 군주들처럼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신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가족 구성원이든 간에,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권리는 가계도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것이었다. 한편, 평민들은 왕족의 혈통으로 태어나지 않고 농노로 세상에 태어나 귀족의 이익을 위해 노동했고, 운이 좋으면 자녀들을 낳아 다음 세대에 걸쳐 그 순환을 반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봉건제도의 붕괴로 신흥 부유층 상인 계급(부르주아)이 생겨났고 과학의 발전은 수세기에 걸친 종교적 교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계몽주의 철학의 확산은 군주들의 몰락과 민주주의의 발흥으로 이어졌고, 산업혁명은 강도 남작들의 부상과 새로운 가문이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길을 열었다.

19세기 후반, 록펠러나 로스차일드 같은 신흥 가문들이 유럽의 옛 왕조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사회에서 두각이 나타난 것은 새로운 사회 혁명과도 같았다. 미국과 유럽의 석유재벌들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시작하며 사회의 엘리트 통치에 대한 새로운 명분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초자연적 질서에 호소하는 것을 버리고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당시 떠오르던 '우생학'은 그 흐름에 딱 들어 맞았다.

답은 그들의 유전자에 있었다.

연구 조사관 조 플러머(Joe Plumm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적자생존에서 비롯되는 이 우생학적인 생각이, 인류의 가장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행동들에 대해 그럴듯한 과학적 변명을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생식,짝짓기 등에 대한 접근을 조절함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는 생각은 이미 수천년 동안 존재해 오던 생각이다."

우생학은 1800년대 후반, 다윈(Darwin), 웨지우드(Edgewood), 특히 "다윈의 불독"으로 알려진 토마스 H. 헉슬리(Thomas H Huxely)같은 사람들 사이에 강력한 형태로 등장했다.

1800년대 후반 새로운 지지를 받아 부상하던 우생학적 관념은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로스차일드의 은행 네트워크로 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던 강도 남작들과 귀족 가문들에 의해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파비안(Fabian) 사회는 대영제국의 상류층 사람들과 같은 많은 이주자들과 동요자들이 팽배했던 사회였으므로 우생학 관념은 훨씬 수월하게 곳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 전역에 강제 불임 캠페인 부흥이 거세게 일어나게 된다. 만약 당신이 낮은 IQ를 가지고 있다거나, 유전적으로 어떤 선천적 질병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당신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권리가 없었다.

노스 캐롤라이나 우생학 협회 '사회 위생을 위한 불임 수술 명령'

우생학은 사이비 과학

물론 우생학은 사이비 과학이었다. Galton과 그의 동료들이 이 우생학 이론을 개발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유전자와 DNA를 포함한 유전의 실제 메커니즘의 확인이 거의 100년 전에 이루어져던 상태였다. 대신 그들은 빈곤이나 범죄를 진단하기 위해 "나약한 정신"과 같은 정의가 없는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했으며 그것은 "결함 있는 생식질"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들은 알코올 중독이나 낮은 지능의 신체적 표현을 결정하기 위해 두개골의 모양을 확인하는 골상학을 사용하기도 했다. 결국 우생학의 근거없는 사이비적 행로에, 헨리 고다드(Henry Goddard)의 '칼리카크 가족 연구(Kalikak family study)'같은 우생학 시대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조차 그 저자들에 의해 완전히 불신을 받기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서는 부정되기까지도 했다.

그러니까 우생학은 100% 사이비 과학이다. 우생학은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특징들을 임의적으로 나열한 것 뿐이다. '나약함'과 같은 것은 과학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찰하는 사람의 주관에 의해 변하는 성질로서 본질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약하다는 것은, 말을 더듬어서 정신이 나약하거나 수줍어서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어쩌면 당신의 행동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저 당신이 나약하다고 판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전염성이 있었다. 사람을 홀리는 사이비 과학처럼, 우생학은 아주 적은 노력으로 많은 것을 설명했다. 우생학은 보통 성공적이고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연구자들의 허영심에 호소했고, 우생학은 전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 공학의 규모에 그럴듯한 변명을 제공해 주었다.

미국에서의 우생학 발전: 찰스 데이븐포트 ㅡ 록펠러

우생학이 대영제국의 희귀한 시골에 있는 갤튼(Galton)과 그의 무리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해안가로 퍼졌을 때, 그 물결은 허리케인이 되어 찰스 데이븐포트(Charles Davenport)와 같은 야심 찬 젊은 연구원들을 강타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엄격하고 청교도 가정에서 자란 하버드 출신의 동물학자였으며, 그의 권위주의적 아버지는 1086년 그의 앵글로색슨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신의 족보와 가계도에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

어린 데이븐포트는 롱아일랜드에 있는 생물학 실험실에서 일을 하던 중 우연히 갤튼의 글을 발견하고 삶의 목적을 발견한 것과도 같은 환희를 느꼈다. 갤튼의 우생학을 온몸에 갑칠하며 성장한 그는 나중에 우생학 대의를 위해 중요한 동맹이 된 미국 번식자 협회(American Breeders Associ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사회가 사형제도를 통해 살인자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우생학은 절망적으로 사악한 원형질의 끔찍한 뱀을 전멸시킬 수도 있다."

종교 개종자의 개종에 대한 열정으로 데이븐포트는 우생학 대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야심 찬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 있는 (더 나아가서 세계적으로) 모든 남자, 여자, 아이들의 유전적 배경을 등록하기 위한 우생학 기록 사무소(ERO, Eugenics Record Office)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혈통과 가계에 따라 분류되고 유전적 등급이 할당될 수 있고, 일단 모든 등록이 완료되면 가장 낮은 우생학적 가치를 가진 것들은 유전자 풀에서 제거될 수 있다.

그의 아이디어를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의 우생학 발전이 우선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데이븐포트는 우생학 발전의 자금 지원을 위해 카네기 연구소에 접촉을 시도하고, 우생학 연구를 위해 콜드 스프링 항구 연구소에 연구소를 따로 설립하였고, 머지않아 해리먼의 투자 자금을 통해 데이븐포트는 결국 그가 고안한 "우생학 기록 사무소"를 설립했다.

실로 많은 이들이 열등한 "생식질 (germ-plasm; 이것이 그들이 소위 표현하는 방식이다)"을 찾아내고 조사하기 위해 수 백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했다는 대목은 현대에서 상식 외의 접근일지라도 도덕과 윤리에 감춰진 인간의 본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록펠러 재단이 우생학 기록 사무소에 처음 기부한 금액은 21,650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록펠러 재단의 이름 자체의 명성뿐만 아니라 재단의 기관 인프라와 인력 지원이 증가할 것이라는 약속과 같은 분명한 혜택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록펠러는 그들의 말에 충실했다.

록펠러 의학 연구소의 창립 이사인 윌리엄 웰치(William Welch)와 같은 록펠러 재단 연구원들은 우생학 기록 사무소(ERO)의 이사회에 앉아 활동을 지휘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록펠러 가문은 우생학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을 조사하기 위해 New York의 Nassau 카운티에 10,000달러의 보조금과 같은 특정 연구 기금을 제공했다. 그리고 록펠러는 데이븐포트의 자체 우생학 연구소의 연구자들과 자매 결연을 맺은 사회 위생국(Bureau of Social Hygiene)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는 열성의 사람들을 정리하여 사회를 보다 정화시키고 위생시킨다는 개념이다.

존 D 록펠러 주니어 (John D Rockfeller Jr.)는 처음부터 찰스 데이븐포트의 작업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많은 우생학 문제에 대해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1912년 1월, 록펠러 주니어는 "정신적 결함"이 있는 여성 죄수들이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제도화하는 계획을 떠올렸고 이에 대해 의견을 묻기 위해 데이븐포트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서신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계획은 저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계획이에요. 이것은 우리가 법적으로 고치려 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늘어나는 악폐에서 벗어나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데이븐포트가 "그 계획은 죄수들에 대한 우생학적 심사를 포함해야만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응답했고, 주니어는 바로 그 과정을 실행하는 기관 설립을 위해 20만 달러를 투척했다. 그렇게 설립된 "뉴욕 범죄학 연구소 (The Institute of Criminology NY)"는 록펠러의 '사회 위생국'에 의해 관리되었고 '우생학 기록 사무소'에서 훈련을 받은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0년대 초, 미국 사회 전반에서 우생학 부상

미국의 부유하고 강력한 사람들의 지원에 힘입어 우생학 분야는 몇몇 미친 과학자들의 기이한 취미에서 한 세대 전체의 사회적 대의로 변모했다. 1920년대에 이르면서, 경제학자, 정치인, 작가, 활동가 등 다양한 직업군의 많은 대중들이 저소득층의 "생식질"을 근절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921년 런던 북부에 영국 최초의 피임 클리닉을 설립한 유명한 가족 계획의 개척자 마리 스탑스(Marie Stopes)는 부모가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의 강제 불임 수술을 요구하면서 "결함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맹비난했다.

현재 캐나다의 건강 관리 시스템 설립에 기여한 공로로 캐나다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타미 더글라스(Tommy Douglas)는, IQ가 낮거나 신체 이상이 있는 사람들과 같은 "비정상", "결함" 및 "저능아"의 개념을 옹호하는 석사 논문을 작성하여 McMaster University에 제출했다. 그리고 정부에 "부적격자"가 번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인증할 것을 촉구했다.

오늘날 주류 기획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인기 있는, 케인즈 경제학 이론을 창시한 불세출의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영국 우생학 학회의 회장이었다.

알렉산더 그라함 벨(Alexander Graham Bell)은 여전히 ​​전화기 발명가로 존경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찰스 데이븐포트의 초기 지지자이자 우생 기록 사무소 과학 이사 이사회(Eugenic Records Office Board of Scientific Directors)의 창립 멤버였다. 그는 당시 청각 장애인의 결혼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개입한 "농아 인종의 근절" 캠페인을 공개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극작가이자 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도록 요구하는 정부 위원회의 창설을 지지했다. 만약 이에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쇼는 그 사람들이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죽이고 싶은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사적인 감정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쓸모가 없는 6명의 사람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그들의 본래 가치보다 더 골칫거리인지. 그리고 저는 모든 사람들을 제대로 임명된 이사회에 주기적으로 참석하도록 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예를 들어, 5년마다 또는 7년마다 사람들을 자리에 앉혀서, "선생님, 부인, 현재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죠.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소비하는 만큼 생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러분을 생존시키기 의해 굳이 우리 사회의 큰 조직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삶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별로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출처: 사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조지 버나드 쇼

재단의 기금과 홍보로, 결국 이 우생학자들의 사고방식은 대중문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미국 우생학 협회는 주 박람회에서 '유전학적 건강 테스트'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가족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더 알맞은 가족 대회(Fitter Family contests)"를 후원했다. 또한 협회는 우생학적 메세지를 수용하는 성직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기도 했으며 우생학은 심지어 영화계로도 진출했다.

"우리는 당신 가족의 사례를 주 의료 위원회에 제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제출 및 검사 후에 그들은 당신 가족 전체를 불임 수술시킨다는 중요한 조치를 명령했습니다."

"네? 그게 뭐에요?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

"앨리스, 우리는 당신 가족의 내력을 조사했고, 지난 3대의 대부분은 정신박약이나 선천적인 불구거나 상습적인 주정뱅이였습니다. 각 세대는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주에서는 더 이상 아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그런 사람들이 수술을 받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출처: 영화 '내일의 아이들 (Tomorrow's Children)'

그러나 단지 그들의 우생학적 생각을 대중화하는 것이 우생학자들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들은 생각을 실현하는 직접적인 행동을 원했다. 여기서 그것은 "인류로부터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단계"를 의미한다.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 대한 "정부의 허가된 살인"은 항상 한 가지 선택 사항이었다. 그리고 정부의 선택적 살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버나드 쇼와 같은 극작가들만이 아니었다.

모든 계층의 우생학자들은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서 "부적격자 살생"에 대한 생각을 항상 논의하고 토론했다.

1915년, 미국 우생학 협회(American Eugenics Society)의 소장 메디슨 그랜트(Madison Gran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생명이 신성한 것이라는 감상적 믿음은 잘못되었다. 이는 결함 있는 유아들을 제거하는 것과 공동체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어른들을 불임시키는 것, 둘 다를 막는 경향이 있다. 자연의 법칙은 부적합한 사람들을 말살할 것을 요구하고 인간의 삶은 그것이 지역 사회나 인종에 적용될 때에만 비로소 가치가 있다."

그러나 주류 우생학자들은 이러한 접근법이 당시의 정치적 사법적 환경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헨리 고다드는 칼리카크 가족에 대한 그의 악명 높은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저능아처럼 우리 교육기관에서 볼 수 있는 혐오스러운 불행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은 '살생'이라는 치명적인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 방법의 실현으로부터 꾸준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행될 가능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번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더 용인될 수 있는 대안적 해결책으로 '강제 불임'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 우생학 강제 불임법 및 안락사 "국가법 제정"

미국의 인디애나주는 1907년 미국 최초로 '우생학 불임법(eugenic sterilization law)'을 통과시켰고, "부적합자들"에 대한 불임 수술 합법화를 통과시킨 주는 머지않아 미국에서 12개로 늘어났다.

이 법에 따라 수천 건의 불임 수술이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이것은 우생학자들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접근 방식이 너무나 산발적이었다. 인디애나주 자체의 강제 불임법은 1921년 주 대법원에 의해 뒤집혔다.

다시 한 번, 록펠러가 자금을 지원하는 우생학 기록 연구소(ERO)에서 찰리 데이븐포트의 오른팔인 해리 래플린(Harry Laughlin)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했다. 그는 '1924년 버지니아 불임법'의 기초가 된 1922년 "모델 우생학 불임법 (Model Eugenic Sterilization)"의 초안을 작성한 인물이었다.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우생학자들은 스스로 법의 합헌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소송을 대법원까지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재판에 회부할 적절한 테스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간질도 정신박약도 아니었던 "버지니아 주의 간질 및 정신박약의 18세의 캐리 벅(Carrie Buck)"에게서 사건에 적용시킬 적절한 사례를 발견했다.

Amy Goodman: Carrie Buck과 함께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Adam Cohen: 그녀는 버지니아 샬로츠빌에서 미혼모에 의해 자라고 있던 여성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가난한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내 중산층 가정에 두는 것이 더 낫다는 믿음이 종종 있었던지라 그녀는 미혼모로부터 분리되어 그녀를 매우 나쁘게 대했던 위탁 가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위탁 부모를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조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들을 위해 많은 집안일을 했고 이웃들에게도 불려가 똑같은 일들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 그녀는 양어머니의 조카에게 강간을 당하고 혼외 임신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족은 그녀가 임신한 것을 돕는 대신 그녀를 간질과 심신미약으로 선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실상 그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던 그녀는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 외곽에 있는 간질 및 심신미약자 집단으로 보내졌습니다.

Goodman: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Cohen: 그녀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어요. 버지니아는 방금 우생학 불임법을 통과시켰고 법원에서는 그것을 시험하기를 원하고 있었죠. 그래서 그들은 이 소송에서 승소할 완벽한 원고로서 캐리 벅을 활용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캐리 벅을 버지니아에서 처음으로 우생적 불임수술을 받을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정했고 그녀는 갑자기 미국 대법원으로 향하는 사건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는 불상사를 겪게 됩니다.

출처: Buck 대 Bell: 70,000명을 강제로 불임시키고, 나치를 고무시킨 SCOTUS 사건 내부 https://www.democracynow.org/2016/3/17/buck_v_bell_inside_the_scotus

이 사건은 단순히 강제 불임수술 문제에 대한 대법원의 승인을 받기 위해 조작된 가짜 사건이었다. 캐리 벅의 "독립 변호인"은 그녀의 불임 수술을 추진한 단체의 창립 이사 중 한 명인 얼빙 화이트헤드(Irving Whitehead)였으며, 무엇보다 캐리 벅은 정신박약이 아니었고, 캐리가 강간을 당한 결과로 낳은 딸 비비안 벅도 정신박약이 아니었다. 한 사회복지사는 재판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아주 평범하지 않은 모습은 있었지만 구분하기는 힘들다"

이러한 사실들 중 그 어떤 것도 대법원 측에 중요한 것은 없었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전 대통령이 주재한 법원은 "캐리 벅의 강제 불임수술" "버지니아 우생학 불임법" 자체의 합헌성을 지지하기 위해, 8대 1로 찬성했다.

그리고 판결문을 작성한 사람은, 법원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대법관 중 한 명이자, Genetic East Coast를 설립한 전통적 엘리트 집단 "Boston Brahmin" 출신의 우생학자, 올리버 웬델 홈스 주니어 (Oliver Wendell Holmes, Jr)였다.

올리버 홈스는 그의 판결 [Buck v. Bell, 274 U.S. 200 (1927)]에서, 캐리 벅과 같은 사람들의 강제적인 불임 수술을 정당화함으로써, "국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불임을 위해 정부가 백신을 강제 접종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어 "만일 사회가 범죄적으로 타락한 자들을 처형하거나 그들의 어리석음을 그저 방관하고 내버려두는 대신 그들이 동족을 번식하는 것 자체를 확실하게 막을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를 위해 더욱 좋은 일이다. 백신 접종을 유지하는 원칙은 나팔관을 절단하는 것을 커버할 수 있을 만큼 훨씬 광범위하게 효과를 발휘한다"라고 선언하며, 다음과 같은 불명예스런 발언으로 결론을 맺었다. "얼간이는 3대면 족하다."

그렇게 올리버 홈스의 판결로 드디어 우생학을 위한 수문이 열렸다. 대법원의 결정에 부합하기 위해 새로운 우생학 법이 제정되면서, 이전에 은밀하고 낮은 자세로 이루어졌던 강제 불임 수술이 이제는 자랑스럽게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불임 수술을 받은 억울한 사람들이 수천 명,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록펠러 가문과 동료들의 막대한 재산에 의해 피어난 우생학의 시대가 마침내 도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록펠러 가문은 국내에만 매여있던 우생학의 세계화 추진을 위해 적극 자금을 지원했다. 1922년 11월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에 걸쳐 록펠러 재단은 독일 과학자들에게 일련의 보조금과 장학금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돈으로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이 펠로우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황폐화된 독일의 과학계 기반을 변화시켰다. 록펠러 재단의 돈은, 정신 의학 연구소와 인류학, 인간 유전, 우생학 연구소를 포함한 일련의 과학 연구소들카이저 빌헬름 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s)의 금고로 들어갔다.

이 록펠러 거액의 주요 수혜자 중 한 명은, 카이저 빌헬름 정신의학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자 제3세계 독일 우생학 프로그램의 핵심 설계자에른스트 뤼딘(Ernst Rüdin)이었다.

뤼딘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히틀러가 임시 총리로 임명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1933년 7월 14일 통과된 "결함 있는 자손 방지를 위한 법률 (Law for the Prevention of Defective Progeny)"에 대한 공식 규칙과 논평을 공동 편집했다.

대법원의 지지를 통해 캐리 벅과 수만 명의 다른 미국인들을 불임으로 이끈 버지니아 불임법처럼, 이 법 역시 해리 래플린의 "모델 우생학 불임법(Model Eugenic Sterilization)"을 참고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유전적 건강 법원 (Genetic Health Courts)"을 설립을 통해 "결함있는 사람들"을 8가지 다른 범주로 분류할 것을 의무화했다: 정신박약자, 정신분열증 환자, 조울증 환자, 헌팅턴병(유전적 신경계 뇌질환)환자, 간질 환자, 유전적 기형을 가진 환자,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9번째 범주인 알코올 중독자는 선택적으로 목록에 추가될 예정이었고 일반 주정뱅이는 포함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 해 말까지, 62,400명의 독일인들이 번식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아야 했고 1945년까지 그 숫자는 400,000명에 달했다.

1940년대, 이 우생학 프로그램은 Aktion T4 프로그램에 따라 '불임'에서 '안락사'로 확장되어, 70,000명 이상의 어린이, 노인 및 정신병 환자들이 나치 정권에 의해 살해되기에 이른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1939년 9월 이른바 ‘T-4 프로그램’을 실행하라는 극비 지령에 서명했다.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 등 "부적격자"에 대한 집단살인 허가 문서였다. T-4라는 이름은 그 사무국이 있던 베를린 티어가르텐 4번지에서 유래했다.

히틀러는 “병자나 기형아를 절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병적인 인간을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천 배나 자비심 깊은 일”이라고 했다. 알다시피 T-4 프로그램은 나치 독일이 혼자 탄생시킨 기형적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 탄생한 사이비 우생학에 따라 미국에서는 이미 1907년 인디애나 주를 시작으로 1931년까지 30개 주가 정신병자 백치 강간범 등 부적격자들을 거세하는 거세법을 시행했다.

독일도 1932년 부적격자를 자발적으로 거세하는 단종법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나치가 정권을 잡자 이를 강제 규정으로 바꿔 30만 명을 거세했고, 급기야 T-4 프로그램을 가동시킨 것이다. 집단살인은 ‘샤워실’로 불린 가스실에서 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런 야만적 행위의 비밀이 유지될 리 없다. 장애를 입은 참전용사에게도 예외 없이 이를 적용하자 군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종교계가 저항에 나섰다. 클레멘스 폰 갈렌 주교는 공개 강론을 통해 T-4 프로그램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히틀러는 1941년 8월 18일 T-4 프로그램의 중지를 명령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은밀한 작전은 계속됐다. 이미 7만여 명이 희생됐지만 그해 말까지 9만여 명이 추가 살해됐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졌다.

어쨌든 T-4 프로그램은 복지시설과 병원에서 환자의 수를 급감시켰다. 한 복지시설 원장은 “우리 시설에 병자는 없다. 건강한 자와 사망한 자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1950년 이후의 우생학 - 대중의 논란으로 이름 변경

사태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진정되면서 "우생학"이라는 이름은 일반 대중의 마음속에서 나치와 동의어가 되었다. 분노한 우생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와 작업이 더 이상 우생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코 그것은 우생학의 중단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대중들은 '우생학'이라는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현재 '우생학' 대신 대중들이 듣는 것은 '분자 생물학'이다. 우생학을 대신하는 이러한 종류의 구어체 용어들은 모두 록펠러 재단이 개발한 것으로, 록펠러 재단은 당시 미국, 영국, 독일 등지에서 우생학 자금을 지원한 가문 중 하나였으며 히틀러에게도 자금을 지원한 가문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집단 학살에 자금을 지원했던 사람들과, 실제로 인구를 도살하고 통제하고 불임시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많은 중복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오늘날까지도 사회 곳곳에 은밀히 침투하고 있다.

미국 우생학회(American Eugenics Society)의 공동 설립자인 프레드릭 오스본(Frederick Osborne)'우생학 정치와 제안(Eugenics Policies and Proposals)'이라는 문서에 직접 썼듯이,

"우생학자들의 목표는 이제 우생학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달성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래서 프레드릭 오스본은 '미국 우생학회' 사무실을, 존 D 록펠러 3세의 '인구 위원회(Population Council)' 사무실로 옮기고, 1957년에 인구 위원회의 회장이 되었다.

록펠러와 동료 석유 재벌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스스로가 유전적으로 열등한 자들로부터 지구를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회 정화 명목의 우생학적 탐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우생학을 다른 이름으로 포장해야 했을 뿐이다.

열성인자들을 제거해서 사회를 깨끗이 하겠다는 개념으로 "사회 위생"이라는 이름을 단체명으로 당당히 내건 그들의 행태에서 그들의 사상이 여실히 느껴진다. 현재 방역을 위한 소독은 그야말로 사회 위생을 위한 소독 그 자체이다.

자연 치료법이라는 의료 방식을 모두 소탕하고 현대 서양 의료 시스템(화학 의약품, 수술, 입원, 방사선)으로 변모시킨 주역 '록펠러 의학 연구소'는 실로 우생학 기록 사무소와 지휘 체계도 함께 하고 있었다. 서양 의학은 그들이 설계한 학계적 프레임을 공신력으로 내세우며 꾸준히 대중들의 인식을 바꿔왔지만, 우생학은 대중들의 경멸 속에 프레임을 바꾸어 은밀히 유지를 지속하고 있다. 홍보와 교육과 함께 서양 의학 시스템이 가열차게 전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결을 함께하는 우생학의 존재를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대중에게 드러나 있나 감추어져 있나의 차이일 뿐.

우생학은 많은 대중들이 쉬이 접하지 못한 낯선 용어와 개념이다. 왜 현대의 공교육과 미디어는 불임과 안락사를 법제화한 '우생학'의 역사적 행보에 대해 전혀 다루고 있지 않는 것일까. 우생학은 숨겨져 있고 여전히 존재한다.

현대의 백신에 무슨 성분이 들어있는지 굳이 하나하나 찾으며 귀납적 추리를 꾀하지 않아도 점진적 역사를 통해 현상의 역학적 관계를 파악하면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흐름을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즉, 해수의 흐름을 알면, 해수의 방향을 알기 위해 굳이 지금 서 있는 물 속의 자갈 알갱이들을 일리리 헤집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부: 지구 온난화(기후변화)

우생학의 연장

모리스 스트롱(Maurice Strong)은 1972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의 견해를 포함하여 스톡홀름 회의를 준비하면서 축적한 모든 증거까지 고려할 때, 저는 인류의 운명을 예언하는 그들의 의견이 진지하게 수용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종말의 날에 대한 가능성 말입니다. 저 또한 종말이 불가피하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서류상으로, 모리스 스트롱 말고는 현대 환경 운동의 "대부" 자리를 대신할 후보는 없다.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캐나다 매니토바 시골의 가난한 한 가정에서 자라 중학교를 중퇴한 모리스 스트롱이 부와 정치적 영향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설립한 환경 단체, 그가 주재한 회의, 지휘한 캠페인, 경력 기간 동안 그가 받은 찬사는 훨씬 더 놀랍다. 스톡홀름 환경 회의 주최자, 유엔 환경 계획 창립 이사, 리오 지구정상회의 사무총장, 지구 위원회 및 지구 헌장 운동의 설립자, 세계 자원 연구소 의장, 세계 환경 및 개발 위원회 위원, 그리고 지속가능한 국제 협회, 스톡홀름 환경 연구소, 아프리카계 미국인 연구소에 이르기까지 그가 참여한 환경 단체들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20세기 환경 운동의 유비쿼터스 인물인 모리스 스트롱에 대해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무엇보다 그의 배경이었다. 모리스 스트롱은 록펠러와 연계된 앨버타 유전지대 출신의 백만장자로서, 환경 운동과 주요 석유 회사 운영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인류의 탄소 절감을 주창하는 환경 운동과 석유 회사를 동시에 운영하는 이런 역설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환경 운동 출현의 역사부터 조사해야 한다. 지구 온난화를 빙자하여 인류의 화석 연료 줄이기를 요구하는 인류의 신환경 운동 말이다.

지구 온난화 - 환경 보호 운동의 출현

인구를 통제하려는 욕망이 새로운 가면을 썼다: 인류가 야기시키는 자원 고갈, 환경 오염, 그리고 생태 재앙으로부터 전 세계 지구를 보호해야한다는 가면. 그들은 인류의 활동과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지구에 재앙이 드리우고 있으며 이는 인간에 의함이다'라는 명제를 내세워 인류의 흐름을 통제하려 들고 있다.

문명의 건설과 함께 동반된 무분별한 인류의 활동이 순수한 자연을 벌목하고 오염시켜 온 것은 응당 사실이다. 우리는 환경을 보호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을 지구의 온도 상승과 교묘히 연결시켜 지구에 곧 재앙이 드리운다는 명제를 설계하고 도출한 것은 그들이다.

얼마나 마음 약해지는 키워드인가. "환경 보호와 자연 보호"

문명 이래로 인류의 삶 자체가 환경 오염과 공존해왔기 때문에 그저 '환경이 오염된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와 같은 단순 명제는 그들의 정책 실현을 뒷받침해 줄 그 어떤 강한 명분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더한 책임 전가의 신파. "나 때문에 지구가 아프다."

"인류의 무분별한 활동 때문에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인류와 지구가 위험하다. 이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인구 감축 및 통제의 정책 마련을 위해 그들이 설계한 완벽한 지구 온난화의 시나리오이다. 이러한 정치적 신환경주의 움직임이 일자마자 록펠러 가문은 언제나 그랬듯이 막대한 자금과 조직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그들이 외치는 "지구의 위기"는 그들의 입장에서 실로 위기가 맞다. 다만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환경 오염으로 인한 위기가 아니라 인구 증가로 인한 위기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지구 온난화 프로파간다가 한창이다. 그들이 기후 변화 환경 보호 퍼포먼스를 하며 지구의 위기를 논할 때 마다 이렇게 해석하면 된다. "지구 정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구 정화를 위해 인구 정화가 필요하구나."

Raymond Burr: 닉슨 대통령과 미 의회는 "인구 성장과 미국의 미래에 관한 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 독특한 위원회의 의장은 존 D 록펠러 3세(John D. Rockefeller III)입니다.

John D. Rockefeller III: 우리에겐 매우 광범위한 임무가 있습니다. 이전까지 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단체들은 그 아무도 없었습니다. 삶의 질에 관한 이러한 문제는 현재 핵심 쟁점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Raymond Burr: 안정화를 위한 대책이 국가에 분명 필요로 된다는 것이죠?

John D. Rockefeller III: 네, 우리는 인구가 무한정 계속 증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우리는 조사 결과에서 이제 국가가 안정된 인구를 환영하고 계획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환경 오염 및 인구에 대한 문제는 놀랍도록 빠른 시간에 전면에 나타났고, 1969년 7월 Nixon 대통령은 이 문제와 관련해 의회에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 성명서에서 닉슨 대통령의 관심과 전 세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잘 반영한 두 문장만 발췌해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금세기 마지막 3분의 1 인류 운명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 중 하나는 인구 증가일 것"이라고 말하며 "이 도전에 대한 인간의 대응이 2000년의 자긍심 요인이 될 것인지 절망의 원인이 될 것인지는 오늘 우리가 하는 일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출처: Survival Of Spaceship Earth (1972)

록펠러 가문이 이러한 "국제 환경 운동"을 형성하는데 동참한 인물들은, BP의 뒤를 잇는 영국 왕족과 Royal Dutch Shell의 뒤를 잇는 네덜란드 왕족을 포함한 대서양 전역의 동료 석유재벌들이었다.

그리고 우생학에서 인구 통제로 전환을 촉진시킨 사람은 '용감한 신세계'의 작가 올두스 헉슬리의 동생이자 "다윈의 불독"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인 "줄리안 헉슬리 (Julian Huxley)"였다. 줄리안 헉슬리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영국 우생학회(British Eugenics Society)에서 회장직을 맡았던 헌신적인 우생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전후의 다른 우생학자들처럼, 당시 대중들에게 당당히 드러낼 수 없던 불명예스러운 우생학 연구를 다른 모습으로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소위 유네스코로 알려진 유엔교육과학문화 기구(UNESCO)의 창립 이사였던 줄리안 헉슬리는 유네스코의 창립 문서에 '우생학의 원인을 정치적으로 다시 한번 실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로선 문명의 간접적인 영향은 우생적이라기보다는 이질적일 가능성이 높으며, 어쨌든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유전적 어리석음, 신체적 약점, 정신적 불안정성, 그리고 질병 취약성 등이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급진적 우생학 정책이 대중들의 반발에 의해 정치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수년 동안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유네스코는 우생학 문제를 가장 주의 깊게 꾸준히 검토해야 하며, 대중에게 위태로운 문제를 알려서 그들이 지금은 당장에 "생각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적어도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줄리안 헉슬리는 유네스코(UNESCO)를 발판으로 1948년 국제자연보전연맹을 설립하고 1961년 세계야생생물펀드를 설립했을 때, 그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이런 우생학 사상의 재도입을 위한 완벽한 전선을 찾은 듯 했다.

빌더버그 그룹의 설립자이자 IG 파르벤 재벌의 전 직원인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왕자영국의 필립 왕자뿐만 아니라 록펠러 가문의 고드프리 A 록펠러도 이 펀드의 공동 설립자로 참여했다. 그들은 여론 활용을 통해 환경 보존의 필요성에 대해 세계를 교육하기로 약속했다. 증가하는 인구가 한정적인 지구의 자원에 가하는 부담에 대한 수년간의 "교육"은 지난 세기 동안 세계의 핵심 자원 중 하나를 독점한 바로 그 석유재벌들이 지불해야만 했다.

인구 감축을 위한 첫 국제 환경 운동 - 1972 UN 인간환경회의

무한이 불어나는 석유재벌들의 최종 욕망은 전 세계 인구 통제였으며, 그들은 그들의 숨겨진 야욕을 "전 세계 지구 환경 보존"운동이라는 새로운 의제를 통해 실현하려 했다.

휴 다운스: 이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적인 운동이 진행 중입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국민들과 세계 각국이 함께 했습니다. 여기 있는 세계 대표들이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를 파괴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을 보아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질병을 고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 UN 인간환경회의

출처: Survival Of Spaceship Earth (1972)

그렇다. 록펠러가 자금을 지원한 프로파간다에 따르면, 그 "지구의 위기 (실은 인구의 증가)"에 대한 "해결책"은 록펠러 3세를 전문 해설자로 등장시킨 유엔(UN)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국제연합 유엔 본부는 록펠러가 자비롭게 막대한 기금을 기증한 곳이었다. 유엔은 록펠러 가문 그 자체였다.

인구 증가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세계 최초의 국제 환경 회의인 'UN 인간환경회의 (UNCHE: UN Conference on the Human Environment)'조직하는 것이었다.

1972년 6월 11일 동안 스톡홀름은 환경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이었다: 113개국에서 온 1,200명의 공식 대표단이 제1차 인류 환경 국제 회의를 위해 스톡홀름에 있었다. 스웨덴이 유엔에 처음 제안하고 1968년 총회에서 승인한 이 회의는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항상 신문의 뒷면에서 글틈을 채웠던 인간의 환경 관련 주제는 이제 신문 1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급성장하는 석유재벌들을 위한 제도적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인류 환경 회의를 완벽하게 감독할 수 있는 사람이 석유재벌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모리스 스트롱: UN 인간환경회의가 113개 참가국과 이들 국가의 고위급 대표단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한 진전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번 계기를 통해 세계 대다수 국가들의 진정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1972년 UN 인간환경회의(1부)

https://youtu.be/mJUk70tfELA

모리스 스트롱: "석유재벌 = 지구환경운동가" 경로 개척

신기하게도 모리스 스트롱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사람을 만나 때마다 승진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 매니토바 주 오크 레이크에서 태어나 대공황을 겪은 야심 찬 청년 스트롱은 14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북쪽으로 떠났다.

체스터필드 인렛으로 가는 길을 찾은 스트롱은,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s Bay Company)에서 모피를 판매하는 세일즈업에 취직을했고, 그곳에서 "와일드" 빌 리차드슨("Wild" Bill Richardson)라는 인생의 은사와의 만남을 통해 더 큰 세계로 진출한다. 와일드 빌 리차드슨은 캐나다의 가장 큰 석유 회사 중 하나인 맥콜-프론트낵(McColl-Frontenac)을 이끄는 가족의 딸 메리 맥콜(Mary McColl)와 결혼한 인물이었다. 맥콜-프론트낵이라는 회사는 네스빗 톰슨이라는 중개업소를 통해 텍사코 회사에 의해 오랫동안 인수된 중동의 주요 석유 수입 회사였다. 어떻게 보면 모리스 스트롱은 아주 어린 나이에 석유의 세계와 자원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이어 스트롱은 당시 내각 장관이자 캐나다 수상이 될 사람의 아버지였던 폴 마틴 시니어(Paul Martin Sr.)라는 노활한 노인의 눈에 들어 아주 영리한 사내라는 찬탄을 받았다. 폴 마틴은 스트롱의 영특함을 활용하고자 그에게 최상급의 석유밭들을 소개해 주었다 ㅡ 그 석유밭에는 David Rockfeller 석유밭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차드슨를 통해 스트롱은 점점 놀라울 만한 일련의 연결을 만들어 갔다. 먼저 그는 당시 새로운 유엔의 재무장관 노아 모노드(Noah Monod)를 소개 받았다. 모노드는 스트롱을 UN본부 보안 담당 관직으로 고용한 것뿐만이 아니라 젊은 매니토바 농장 소년과 함께 뉴욕에서 살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동안 스트롱은 모노드로부터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접촉인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feller)소개받기에 이른다.

그 순간부터 스트롱은 점차 훌륭한 인재로 성장했으며, 그 순간부터 스트롱이 가는 곳마다 록펠러와 그의 동료들이 항상 배경 어딘가에 존재해 있었다. 스트롱은 그들과 인연을 쌓으며 더 큰 세계로 나아갔다. 스트롱이 UN 안보 일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돌아갈 채비를 하려할 때 록펠러의 알버타 석유 밭에서 그에게 큰 일자리 기회를 준 사람은 다름아닌 스탠더드 오일의 베테랑 잭 갤러거(Jack Gallagher)였다. 그리고 석유 생산업에 전념하던 스트롱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아프리카 여행을 결정했을 때는 아프리카 나이로비에 있는 록펠러의 칼텍스(CalTex)에서 일을 하며 스스로를 부양토록 하였다.

1954년 아프리카의 일을 그만두고 캐나다에서 자신의 회사를 다시 시작했을 때, 스트롱은 회사 관리를 맡기기 위해 헨리 브루니(록펠러 동료 존 J. 맥클로이의 가까운 친구)를 고용했으며, 두 명의 뉴저지 주 스탠더드 오일 대표를 이사회에 임명했다. 20대 후반에 그는 이미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이미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다.

① 1972 스톡홀름 UN 인간환경회의

평생 동안 모리스 스트롱은 이러한 연결과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모리스 스트롱은 1972년 스톡홀름에서 UN 인간환경회의를 조직하도록 선택된 후, 그 즉시 록펠러 재단의 이사로 임명되었다. 재단은 스톡홀름 회의를 위해 사무실에 자금을 지원하고, 카네기 동료 바바라 워드와 록펠러 생태학자 르네 두보스를 팀원으로 제공했다. 스트롱은 그들에게 "Only One Earth"라는 지속 가능한 개발 분야의 기초문서를 쓰도록 의뢰했는데, 이 문서는 세계적인 자원 관리를 촉진하기 위한 핵심 문서로서, 글로벌리스트들에 의해 크게 선전되고 있다.

1972년 스톡홀름 UN 인간환경회의는 유럽 최초의 정부 관리 환경 행동 계획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유엔 관료제인 유엔환경계획(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의 창설로 이어지면서 현대 환경 운동 역사상 획기적인 순간으로 여전히 환영 받고 있다. 당연히, UN은 모리스 스트롱을 UNEP의 초대 이사로 임명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리스 스트롱은 곧장 석유밭으로 뛰어들어 이중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동부 캐나다는 OPEC 석유 금수 조치로 큰 타격을 받았고, 피에르 트뤼도(Pierre Trudeau) 총리는 대안으로 캐나다 자체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캐나다(PetroCanada)'를 설립했다. 그리고 총리는 회사의 첫 번째 사장으로 과연 누구를 뽑았을까. 록펠러가 후원하는 "환경 운동가" 모리스 스트롱이었다.

1978년 그 직책을 떠나 스트롱은 캐나다 개발 투자 공사(Canada Development Investment Corporation) 회장에서 AZL 자원 주식 회사 (AZL Resources Incorporated) 회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UN의 기근 구호 프로그램을 이끌기까지, 믿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이며 일련의 정부, 민간 부문 및 국제 임명을 계속 도맡았다.

② 1987 제4차 세계야생회의

1987년에 모리스 스트롱은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스톡홀름 인간환경회의만큼 주목할만한 또 다른 환경 회의를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제4차 세계 야생 회의(4th World Wilderness Congress)라고 불리는 이 회의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렸으며 Strong, David Rockefeller, Edmond de Rothschild,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James Baker, 그리고 다른 석유 재벌들, 은행가들, 워싱턴의 권력가들 및 글로벌리스트들이 함께 했다.

세계야생회의에 모인 세계 정상들은 표면적으로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이 회의에서 실질적으로 논의한 내용은 아주 놀라웠다.

DAVID LANG: 따라서 저는 이것이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지기를 제안합니다. 불행히도 지구를 채우고 있는 총알받이들(cannon fodder)을 교육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너무 많은 자금이 소모될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트주의적인 프로그램을 취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위치를 넘어서, 쉽게 이해할 수 없거나 지적 정직과 함께 일종의 단순한 정의로 축소될 수 있는 시간의 틀과 결과에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출처: 조지 헌트의 '유엔 UNCED 지구정상회의'

https://youtu.be/r8c-NKjOOA0

이것은 회의에 참석했던 몬트리올의 은행가, 데이비드 랭(David Lang)의 발언 중 일부이다. 데이비드 랭을 비롯하여 록펠러, 로스차일드 그리고 다른 은행가들과 석유재벌들 등 회의를 참석한 사람들에게 일반 대중은 불행히도 그저 "지구를 채우는 총알받이"이다.

이 솔직한 입장은 석유재벌들에 의해 존재하게 된 지구 보전 운동의 중심에 있는 우생학 사상을 완벽하게 요약한 것으로, 회의를 돕기 위해 자원한 콜로라도 주, 볼더의 사업가 '조지 헌트(George Hunt)'가 테이프에 완벽히 담아낸 회의 녹음본 내용이다. 조지 헌트는 그곳에서 목격한 일에 소름이 돋고 겁에 질려 그 즉시 사라졌지만 1990년대 초, 이 그룹과 이들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대중에게 엄중히 경고하기 위해 자신의 녹음 테이프를 기꺼이 공개한다.

조지 헌트에 의해 유출된 제4회 세계야생회의 녹음본 (사진 클릭)

조지 헌트의 녹음은 그 회의에서 모리스 스트롱(Maurice Strong)이 배런 에드몬드 드 로스차일드 (Baron Edmond de Rothschild)를 환경 운동의 선구자이자 "환경 보존 은행" 개념의 창시자로 소개한 순간도 포착했다.

모리스 스트롱: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계획 중 하나는 "환경 보존 은행" 프로그램입니다. 오늘 아침에 언급했듯이 운 좋게도 우리는 이 매우 중요한 개념의 근원이 되는 사람을 회장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 회의를 후원한 국제 야생 재단(International Wilderness Foundation)의 이사이며, 이 회의의 우두머리입니다. 따라서 "환경 보존ㅡ경제 발전 간의 관계"로 선구적 전환을 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 분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환경, 보존, 경제 간의 긍정적인 종합을 자신의 삶에서 전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에드몬드 드 로스차일드(Edmond de Rothschild)를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에드몬드 드 로스차일드: 모리스, 당신이 말한 모든 것에 대해 정말로 감사합니다. 청중분들은 모리스가 저에 대해 말한 모든 것에 약간의 조미료가 가미되어 있다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출처: 조지 헌트의 '유엔 UNCED 지구정상회의'

자본의 순환에 의해 축조되는 인류의 문명 사회는 기본적으로 환경을 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환경의 파괴를 연료삼아 전진하는 자본주의 기술 사회에서 환경 보존과 경제 발전을 동일선 상에 엮는 어불성설의 개념은 그들만이 꾀할 수 있는 책략이다.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선량한 대중의 마음과 자연 보존의 선의까지 악용하는 그들이다.

이 회의에서는 석유재벌들의 중요한 목표(인구 감축 및 통제) 달성을 위한 몇 가지 계획이 도출되었다.

그 중 하나는, 대중의 인구가 크게 배제될 수 있는 광대한 자연 지형인 "야생 지역(Wilderness Areas)"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야생 지역"은 영국 우생학 학회 회장인 줄리안 헉슬리 (Julian Huxley)가 세계 야생 동물 기금을 창설하기 위해 발판으로 사용한 기구인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에 의해 ​​지정되고 감독되었다. 지구의 자연 보호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는 야생 지역의 확장을 통해, 인구의 거주 지역을 줄여가며 자연스레 인구의 수도 감축하겠다는 계획이다.

• 이어 또 다른 중요한 계획은 로스차일드가 제안한 것으로, 전 세계 개발 프로젝트를 위해 초국가적 수준의 운영을 통해 재정을 조정하는 소위 "세계 환경 보존 은행 (World Conservation Bank)"의 창설이다.

Edmond de Rothschild: 현재 "국제 환경 보존 은행" 프로그램의 개념에 대한 회의에는 정부 및 정부 간 기관, 공공 및 민간 기관, 대규모 자선 재단, 전 세계 일반 개인 등 인간 공동체의 모든 부문이 포함됩니다. 일반 대중과 전 세계의 모든 기업체에 접근하여 이익의 일부를 우리의 생태 및 환경 보호에 사용할 수 있도록 면세를 제공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모든 국가에는 고유한 문제가 있으며 원주민과 야생 동물이 있습니다. 이 국제적 보존 은행은 국경도 경계도 없어야 합니다."

출처: 조지 헌트의 '유엔 UNCED 지구정상회의'

이 "세계 환경 보존 은행"은 모리스 스트롱(Maurice Strong)의 다음 주요 회의에서도 전달되어 결국 실현되기에 이른다. 다음 그 주요 회의는 바로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유엔 환경 개발을 위한 회의(UNCED), 즉 지구정상회의(Earth Summit)이다.

③ 1992 지구정상회의 (Earth Summit),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이 지구정상 회의는 환경 운동가로서의 모리스 스트롱의 뜻밖의 결정적인 업적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여전히 "환경 운동 회의"의 시금석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해설자: 1992년 6월, 세계는 지구의 운명을 논의하기 위해 리우에서 만났습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이 정상 회담이자 최초의 지구 정상 회담에서 166개국, 130명의 국가 원수, 15,000개의 비정부 기구의 대표들이 환경 보존과 경제적 필요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구체적인 합의를 결정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출처: 1992 - UN 지구정상회의 - 리우데자네이루 - 우리 손안에

조지 H. W. 부시: 지구정상회의 조직을 위한 무한한 노고에 대해 모리스 스트롱 사무총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정말 역사적인 모임입니다. 경제성장과 환경보호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존 메이저(John Major): 세계는 우리의 정원이며 우리는 함께 그것을 경작해야 합니다. 이번 주 리우에서 우리는 그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리우를 넘어 우리는 세계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모리스 스트롱(Maurice Strong): 우리는 안주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도달한 합의에 중대한 변화에 대한 약속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21세기 인류 종의 상태는 극도로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출처: 리우 지구 정상 회의 (B)

1992 지구정상회의의 산물

모리스 스트롱과 석유재벌들의 의제를 진전시키는 데 있어 유용했던 1987년 제4차 세계야생회의는, 5년 후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지구정상회의(Earth Summit)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을 뿐이었다.

1992 지구정상회의 제안을 콩해 에드먼드 드 로스차일드는 "지구환경시설(GEF, Global Environment Facility)"로 불리는 세계환경보전은행(World Conservation Bank)을 출범시킨 뒤 5개 유엔 협약의 자금조달 메커니즘 역할을 하며 전 세계 환경 및 개발 프로젝트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세계환경보전은행의 18개의 "이행 파트너"로는 록펠러가 후원하는 식량농업기구(FAO), 헉슬리가 설립한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모리스가 만든 국제연합 유엔 환경 프로그램(UNEP), 그리고 베른하르트 왕자/필립 왕자/고드프리 록펠러가 설립한 세계야생생물기금(WWF)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구환경시설(gef)의 전문 분야 중 하나는 환경 개발 프로젝트를 위해 토지를 개방하는 대가로 제3세계 국가들이 부채 탕감을 받는 "자연을 위한 부채 교환"이다. 이 프로젝트는 팔라완 섬의 원주민들처럼 현지인을 쫓아내지 않고, 투자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현지 계약자들에게 최대 5%의 거래 비용을 지불한다.

1992 지구정상회의는 또한 유엔기후변화협약에 대한 정부간 기후 변화 협의체(Intergovernment Panel on Climate Change, IPCC)의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UNFCCC와 IPCC는 모리스 스트롱이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설정한 명제에만 얽매여 있는 비정부 기구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기후 변화의 원인은 인류다"라는 결론을 미리 선정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들을 설계해 제시한다. IPCC에 소속된 과학자 팀 볼 박사 (Dr. Tim Ball)는 다음과 같이 내부 고발했다.

팀 볼 박사: "유엔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회(IPCC)를 구성했을 때, 모리스 스트롱(Maurice Strong)은 우리 과학자들이 많이 언급해야 할 표준 용어들을 미리 작성했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기후 변화의 정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도적으로 기후 변화의 원인을 인간의 활동들로만 제한했습니다. 물론 다른 모든 자연적 원인과 자연적인 변동성을 제거했고, 태양 등과 같은 다른 많은 문제들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리스 스트롱은 다른 명제와 용어들로 연구의 경로와 방향을 더욱 제한했고,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연구팀을 세 개의 작업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과학 보고서를 작성하는 기술 그룹인 Working Group 1이 있는데, 2,500명 중 600명이 이 그룹에 해당됐습니다. 나머지 1,900명은 Working Group 2, 3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룹 2,3의 1900명은 그룹 1의 연구 결과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에 별 존재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룹 1의 연구 조차 이미 모리스 스크롱이 제시한 조건들에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룹 1이 발견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룹 2, 3은 "좋아요, 당신들은 지구가 따뜻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그 의미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은 얼음이 녹을 것이고 해수면이 상승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따라서 실제로 1,900명의 과학자들이 작성한 보고서의 대부분은 그룹 1의 발견을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리스 스트롱은 그때 와서 "자, 이 보고서는 정책에 사용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더 많은 제한을 가했는데, 결국 그것은 정책입안자들을 위한 요약집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절대적인 모순이죠.

'정책입안자를 위한 요약서'와 일반 '과학 보고서'는 완전히 다른 그룹에 의해 작성되고, 서로 별개로 독립적으로 작성됩니다. 정책입안자를 위한 요약본은 작성되면 언론에 배포되지만 과학 보고서는 완료되면 따로 분리 보관됩니다. 모리스 스트롱은 과학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에게 정책입안자를 위한 요약본에 담긴 내용과 과학 보고서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라는 조건의 제한을 가하는 규칙도 설정했습니다."

출처: IPCC 폭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1992 지구정상회의 또 다른 산물은, 모리스 스트롱과 함께 본문 초안을 도운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십계명의 대체물로 언급한 준종교적 문서인 지구 헌장(Earth Charter)으로, 가이아 숭배와 세계적 책임의 시대를 맞이하려 했다. 이어 이 문서는 "우리의 가치, 제도, 생활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선언하면서 "전 세계를 공통된 책임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속 가능한 지구촌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 국가는 유엔에 대한 약속을 갱신하고, 기존의 국제협약에 따른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환경과 개발에 관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제 문서와 함께 지구 헌장 원칙의 이행을 지원해야 한다."

Technocracy News and Trends의 편집장이자 작가인 패트릭 우드(Patrick Woo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패트릭 우드: 지구 헌장(Earth Charter)은 궁극적으로 첫 번째 지구 정상 회담의 두 가지 결과물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저의 저서<기술 정치의 부상: 글로벌 변혁의 트로이 목마(Technocracy Rising: The Trojan Horse of Global Transformation)>의 부록에 지구 헌장을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과 협약을 맺는, 세계를 세계화의 단일 개념으로 통합하려고 했던 매우 종교적이고 인문주의적인 문서였습니다. 역사는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공식적으로는 마침내 유엔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서명한 매우 명확한 문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구 헌장의 주요 작성자는 스티븐 록펠러(Steven Rockfeller)였습니다. 그래서 록펠러들은 일찍부터 경제 시스템뿐만 아니라 정치 통제 시스템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그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종교적 믿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기후 변화 - 지구 환경 운동"의 숨겨진 목적

석유재벌들이 수십 년 동안 노력해왔던 것과 1992년 리우 지구정상회의에서 성취한 것은 우생학 철학의 변혁을 완성한 것이었다.

"부적합한 사람들의 불임화"에 대한 우생학적 인구 감축의 의무는 이제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것"과 "지구를 구하는 것"이라는 명목의 새로운 자연 보호 의무로 변화되어 둔갑되었다.

새로운 어휘들로 둘러쌓인 이 지구 보호 운동은 자금이 넉넉한 광고 캠페인과 함께 널리 퍼졌으며 현대 우리의 일상까지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기후 변화 명목의 지구 보호" 어젠다에 숨겨진 최종 목적은

이전의 우생학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터커 칼슨: "스웨덴의 룬드 대학의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이 원한다고 가정한다면, 단순히 번식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부 인간들을 존재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글쎄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것,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탄소를 절약한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출처: '아이를 가지지 마세요' - Tucker Carlson Tonight

제니퍼 러든: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여성 1인당 출산율을 절반으로 줄인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임계점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탄소 배출량의 4분의 1을 줄일 것입니다."

출처: 지구 온난화로 인해 아이를 줄여야 할까?

빌 나이: 그렇다면 선진국에서 자녀를 추가로 낳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할까요?

게스트: 최소한 고려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빌 나이: 고려한다는 것은 결국 실행한다는 것이군요.

출처: 선진국에서 "추가 자녀"를 둔 부모는 처벌을 받아야 합니까?

Fox News 리포터: 일부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를 줄이기 위한 노력의 새로운 주범은 아이들입니다. 영국의 지식인들은 너무 많은 아이들이 지구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대가족, 즉 두 자녀 이상을 지닌 가족은 환경적으로 옳지 않은 상태로 눈살이 찌푸려져야 하는 대상입니다.

출처: 엔드게임(2007)

그리고 대중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지구를 약탈한 대가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석유 산업의 억만장자 후손들은지구를 가득 채우는 "총알받이들"로부터 지구를 구하는 십자군 환경운동가들로 변모되어 있었다.

데이비드 록펠러: 인구 증가가 지구 생태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끔찍할 정도로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출처: 데이비드 록펠러가 인구 통제에 대해 말했다

렉스 틸러슨: 우리는 IPCC의 회원이었으며 많은 논문을 저술했으며 동료들과 함께 모든 논문들을 검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기후 변화에 대한 이해와 진화에 관여해 왔습니다.

출처: 기후 변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Rex Tillerson

해설자: 사우디 아람코(Saudi Aramco)는 석유 생산에서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운영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술과 모범 사례에 대한 협력을 통해 기후 변화에 대한 실질적인 조치를 위한 촉매제가 되려는 석유 및 가스 기후 이니셔티브에 대한 우리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출처: Saudi Aramco - 지속 가능한 생산

클라우디오 데칼지: 우리에게는 공통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생각합니다. 함께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힘,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민 H. 나세르: 10억 달러의 이 투자 기금을 통해 개발될 기술은 장기적으로 배출량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수 존 이마즈: 우리는 함께 협력하여 이 문제에 대한 혁신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싶습니다.

패트릭 푸얀네: 우리는 힘을 모아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출처: OGCI, 혁신적인 저배출 기술에 투자

그리고 오늘날에도 대중들은 환경 보호 캠페인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그들의 흑심은 까맣게 모른 채 그저 석유 산업이 쇠퇴한다는 표면적 반응에만 흡족해 하고 있다.

• 록펠러 가문은 2016년 석유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가문의 이름을 미국 부의 상징으로 만든 석유 재산의 상속자인 록펠러 가문은 석유에서 벗어나서 자신들의 명성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펀드 디렉터 스티븐 하인츠는 석유 재벌 존 D 록펠러에 대해 경건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만약 존D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미래를 내다보는 영리한 사업가로서, 화석 연료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투자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출처: 록펠러 상속인이 석유에서 탈출 | 행운

데이비드 드 로스차일드(David de Rothschild)는 환경 운동의 대표적인 선두주자 중 한 명이다. 아제르바이잔 석유밭 보유로 재산을 불리고 지니 에너지와 같은 벤처 사업을 통해 석유에 투자하는 억만장자 은행가의 후손인 데이비드 드 로스차일드는, 사진 촬영과 홍보에 의해 철저히 '환경 보호론자'로 이미지 캐스팅하여 "플라스틱 예수"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들의 생활 방식이 어떻게 북극곰을 죽이는지에 대해 대중에게 강의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데이비드 드 로스차일드: "우리는 이미 오늘날 기후 변화의 영향을 보고 있고 기본적으로 우리 소비의 영향을 보고 있는 이 나라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해결책에 빨리 돈을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출처: 로스차일드, 기후변화 '과거 대화 시점'

찰스 왕세자는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해 솔직한 입장을 밝히며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겸손한 삶을 살지 않으면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찰스 왕세자: 신사 숙녀 여러분, 기후 변화와의 전쟁은 확실히 우리 시대의 가장 결정적이고 중추적인 도전입니다. 우리는 이 증상을 무시할 수 없으며 너무 늦기 전에 지구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지역 사회, 과학, 사회 및 생활 방식의 전례 없는 변화를 요구할 것입니다. 모두 저탄소 및 순환 경제로의 전환을 전제로 합니다.

출처: 찰스 왕세자 '너무 늦기 전에' 기후 변화에 대한 조치를 촉구

이 석유재벌들은 포스트 탄소 시대라고 부르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제 석유재벌들의 힘은 더 이상 석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구의 통제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한켠의 TV 뉴스에서는 지구 온난화 기후 변화의 이야기가 한창 흘러나오고 있다. 예상대로 팬데믹 이후 요즘 뉴스에서는 연일 기후 변화에 대한 보도가 한가득이다. 팬데믹 다음 두려움 팔기는 기후 변화라고 재차 언급해 왔다.

지난 포스팅들부터 이번 포스팅까지, 이 쯤이면 기후 변화에 숨은 그들의 의제를 정확히 간파해야 한다. "기후 변화- 지구 환경 보호"의 어젠다를 직접 창조하고 대중의 인식을 설계한 그들의 일련의 과정을 보았는가. 우리는 "인구에게 책임을 전가한 자연 대재앙 가설"로 인해 인류의 삶 자체를 강탈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지구 온난화, 기후 변화를 통해 지구와 인류의 자연 자체를 재앙으로써 건드리게 되면, 인류의 삶 자체를 어떤 방향으로든 개혁시킬 수 있는 아주 거대하고 훌륭한 조건적 명분이 마련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팬데믹에 대한 해결책으로 백신을 강요 당했듯이,

우린 기후 변화에 대한 "해결책"으로 어떤 것들을 강요당할 것인가.

- 정부들의 수입 창출의 수단으로 탄소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핑계

- 당연히 쓰고 있는 모든 지구의 자원에 대해 값을 매기기 위한 핑계

(가치 이동: 돈 -> 자원, 에너지)

- 제3세계 발전을 저해하기 위한 핑계

- 인구를 존속시키는 에너지 사용을 저해하기 위한 핑계

- GMO 유전자 조작 산업을 개입시키기 위한 핑계

- 각종 인류 공학 기술 시스템 산업을 개입시키기 위한 핑계

​- 그리고 불임 요구를 위한 핑계 등 등

"인구에 의한 기후 변화- 지구 환경 보호"는 인류의 삶 뿐만 아니라 인체 자체를 변화시킬 각종 인류 공학 기술의 도입까지, 그야말로 인류에 관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인류 통제(CONTROL)"를 위한 강력한 어젠다이다.

이제 그들이 기후 변화와 탄소 문제를 논할 때마다

'우생학 바탕의 인구 감축과 통제를 위해 설계된 명분'이라 해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3부: 기술관료제

자원 & 에너지

인터넷 그리드망을 통해 모두 연결 -실시간 관리 및 통제

자, 이제 세상을 위한 석유의 완전한 순환은, 1857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기 우리가 3-4년 전에 있었던 곳이죠. 이는 1995년경에 정점에 도달될 것으로 예상되며 그 후 우리는 감소세로 접어들 것입니다. 그 중간 80%는 다시 60년대 후반부터 2020년 조금 넘어서까지 퍼져있습니다. 질서 있는 진화를 전제로 여기서 56년 동안 계산해봤어요. 이것은 즉, 지난 10년 안에 태어난 아이가 정상적인 삶을 산다면 세계가 석유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출처: 매리언 킹 허버트 - 전 세계 석유 고갈 (1976)

https://youtu.be/ImV1voi41YY

오늘날, 매리언 킹 허버트(Marion King Hubbert)는 미국이 1970년까지 석유의 최고 생산을 달성할 것이고 2020년까지 지구의 거의 모든 석유 공급이 고갈될 것이라고 예측하여 1950년대에 명성을 얻은 쉘 오일(Shell Oil)의 연구원이다.

허버트의 제자이자 셸 오일의 동료인 케네스 데페이스(Kenneth Deffeyes)는 몇 년 후에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허버트가 그의 예측을 밝히는데 사용한 수치적 방법들은 명확하지 않다. 44년이 지난 오늘, 제 추측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허버트가 먼저 결론에 도달하고 나서 그의 결론을 뒷받침할 원시 자료와 방법을 찾아봤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1989년 사망하기 직전 허버트는 자신의 Peak Oil 논문을 동료들에게 발표하기 전에 Shell의 전무 이사에게 보여주었다. 이 때 전무이사는, 공급 부족의 임박한 위협과 고유가의 필요성이 훨씬 더 약해질 것으로 추정하며 매장량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한 라이벌 지구물리학자 윅스(L.G.Weeks)를 지목하며, 허버트에게 석유 매장량 추정치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말했다.

오늘날 허버트(Hubbert)는 그의 Peak Oil 논문으로만 기억되고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우생학 운동과 매우 유사하게 거의 100년 전에는 크게 유행했지만 대중들의 반감에 탈락한 "특정 운동"을 체계화하고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는 훨씬 더 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예의 바른 대중 사회에서 그 운동은 인기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다른 이름으로 그 명맥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라고 불렸던 운동이다.

Arvid Peterson: 안녕하세요. 저는 Arvid Peterson입니다. 이것은 대안적 사회 시스템인 Technocracy에 대한 두 부분으로 구성된 프레젠테이션 중 첫 번째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여러분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여러분을 겁주려는 의도도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재정적, 철학적, 법적, 종교적 또는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기술적 접근법입니다.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는 미국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답이며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는 과학에 기반을 둔 사회 운영을 위한 새로운 설계입니다. 이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수단입니다."

출처: Technocracy 전체 프레젠테이션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는 스스로를 사회 운동, 철학, 정치 및 경제 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결책, 세계를 질서화하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자처했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것은 '아이디어'인데, 이 아이디어는 엄선된 소수 즉 "기술 관료들"에 의해 가장 미세한 세부 사항까지 설계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이다.

우리말로 "기술관료제" 내지는 "기술 정치"라 일컫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는 그리스어 techne(기술)와 cratos(통치·권력)의 합성어로 과학적 전문 지식이나 과학 기술에 의한 지배를 말한다. 즉, 사회는 과학자들과 엔지니어 기술자들에 의해 통치되고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크노크라시는 1938년 자신들의 출판물인 <The Technocrat's Magazine>에 매우 간결하게 정의되어 있다. 그들은 테크노크라시를 "과학 공학 사회의 시스템"이라고 일컫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경성과학과 사회과학의 합병으로 여겼는데, 이는 정말 모순된 것이다.

사회 과학은 실제로 과학이 아님에도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운 과학에서 사용하는 과학적 방법을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만이 사회를 올바르게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고 믿었다. 기술이 도입되어 사회의 구조를 바꾼 결과, 그들은 정치인을 싫어했고 제도와 사회 조직을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효율적이지 않았고 자원 보존 기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주의와 자유 기업을 대체할 새로운 경제 모델을 정의하기로 결정했고, 그것이 바로 경제 시스템의 대체였다.

과학적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체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와 세속적 인본주의, 프레더릭 테일러가 주장한 "과학적 경영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기술민주주의 운동은 우생학을 탄생시킨 진보주의, 실증주의, 사회적 다윈주의의 동일한 환경에서 출현했다.

우생학자들이 소수의 과학자들과 그들의 억만장자 후원자들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선택적 교배를 통해 인류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기술 관료들도 그들이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함으로써 인류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석유재벌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기술 관료들은 돈을 에너지 인증서로 대체함으로써 세상을 발전시키려 했다.

별난 "혁명적"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이 이끄는, "사회 연구를 위한 새로운 학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와 "기술 동맹(Technical Alliance)"을 중심으로 형성된 테크노크라시 운동은, 허버트(Hubbert)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같은 진지한 연구원들과 하워드 스캇(Howard Scott)같은 동료 공학자 연구원 모두를 끌어들였다.

하워드 스캇 - 테크노크라시 위원회 창설 - 테크노크라시 부흥

불확실한 배경을 가진 "수수께끼의 남자"인 하워드 스캇(Howard Scott)은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뉴욕에 정착하여 '보헤미안 엔지니어 공학자'로 비춰지게 되었다.

1920년 그는 Wobblies에서 연구 이사로 일했으며, 다음 해에는 콜롬비아 대학을 중심으로 한 엔지니어와 과학자 그룹인 기술 동맹(Technical Alliance)을 설립했다. 그리고 기술 운동의 선구자로서 그는 과학자들과 엔지니어 기술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지지했다.

1932년, 카리스마 있고 말을 잘하는 하워드 스캇은 Columbia 대학의 교수이자 대학의 산업 공학과의 설립자인 월터 라우텐스트라우치(Walter Rautenstrauch)와 인연을 맺었다. 테크노크라시에 대한 공통된 관심으로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스캇이 대학 시설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 위해 콜롬비아 총장인 니콜라스 머레이 버틀러(Nicholas Murray Butler)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월터를 통해서 였다.

항상 진보주의의 최첨단을 바라보던 콜롬비아 대 총장 버틀러는 이내 테크노크라시의 기술관료주의적 사상에 휘둘렸고 곧 콜롬비아 대학교 해밀턴 홀 지하에서 스캇의 테크노크라시 위원회가 가동되었다.

버틀러가 자신의 대학 지하실에서 차기 큰 아이디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흘리면서전 테크노크라시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언론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하워드 스캇은 인기 있는 연사가 되었다. 하물며 테크노크라시 운동의 이름을 딴 댄스도 있었다.

하워드 스캇(Howard Scott)

하워드 스캇이 허버트를 만난 곳도 콜롬비아 대학에서였고, 진지한 생각을 가진 연구원이자 괴짜 혁명가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킬 아이디어를 낳는 데 도움을 주었다.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는 콜롬비아에서 처음으로 인정받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테크노크라시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하워드 스콧이 사기였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 운동의 주요 대변인이었던 스캇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이력서를 과장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자신의 과거와 학력에 대해 모두 거짓말을 했다. 그는 고급 공학이나 뭐니 뭐니 해도 유행하는 단어를 모두 알고 있었지만 어떤 예리한 기자가 그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이 사람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버틀러는 그들의 사기 행각이 콜롬비아의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는 "이 사람들이 모두 나를 조롱했다"고 말한 후 "내 건물에서 나가!"라고 명령하며 그들을 모두 밖으로 쫓아냈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홀연히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콜롬비아에 남아있던 기술 관료들은 그 당시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들 중 몇 명이었는데, 그들은 직업을 잃게될까하는 염려에 입을 다물고 다시는 테크노크라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믿음을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콜롬비아에서 아주 오랫동안 테크노크라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매리언 킹 허버트 - 테크노크라시 주식회사 설립 - 테크노크라시 연구

매리언 킹 허버트 (M. King Hubbert)

불명예스런 오욕을 입으며 콜롬비아에서 쫓겨나고, 테크노크라시 위원회그 모이자마자 해체되면서 스캇은 자신이 인생에 있어서 거의 바닥임을 깨달았다. 심지어 무일푼이고 오랜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매리언 킹 허버트 (M. King Hubbert)뿐이었다.

허버트는 스캇을 그리니치 빌리지 아파트에 살게 했고 자신의 자금으로 테크노크라시의 원리를 계승할 새로운 회원 조직인 테크노크라시 주식회사(Technocracy, Inc.)을 설립하고 스캇에게 정관을 제출하도록 했다. 물론 첫 번째 단계는 그러한 원칙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었다.

허버트는 테크노크라시 운동의 바이블인 <테크노크라시 연구 과정(Technocracy Study Course)>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 책에서 허버트는 "대륙의 모든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대륙 규모의 풍부한 물리적 부"의 비전을 제시했는데, 그는 "이는 대륙적 기술의 통제와 지배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술관료제의 테크노크라시 시스템은 달러와 센트가 아니라 국가의 순 에너지 소비를 나타내는 "에너지 증명서"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화폐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했다. 이 증명서는 에너지 단위인 줄스(J)로 표시되며 기술 독재 국가의 통치 과학자들에 의해 적절하다고 간주되는 순 에너지 예산에 기초하여 발행된다.

시민들은 국가 증명서의 동등한 몫을 발급받고 그들과 함께 구매를 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구매에 대한 정보는 중앙 기획 기구에 전달되어 분석을 받게 된다. 이 방법을 통해 기술 관료들은 "열역학적으로 균형 잡힌 생산과 소비의 부하를 만들어 실업, 부채, 사회적 불의를 없앨 수 있었다."

<테크노크라시 연구 과정>에서 허버트는 훌륭한 기술 관료처럼 이 비전이 실현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정확한 조건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기술 관료제 테크노크라시에는 다음이 필요하다.

• 전국의 모든 에너지 사용량 및 모든 소비자 지출이 지속적이고 즉각적으로 계산 및 등록된다.

• 모든 생산 및 소비에 대해서 365일 24시간 목록 작성

• 판매 가능한 모든 제품의 완전한 레지스트리 등록 - 제품이 생산된 곳, 생산에 소비된 에너지의 양, 제품이 판매된 장소와 시기

• 마지막으로 "각 개인의 소비에 대한 특이사항 등록과 개인의 기록 및 설명

허버트의 테크노크라시 비전모든 상호 작용의 모든 세부 사항이 실시간으로 낱낱이 기록되고 중앙 기관에 보고되는 '전체주의 사회'의 비전일 뿐만 아니라, 1930년대, 경제의 모든 재화에 대한 지속적이고 즉각적으로 업데이트되는 데이터 레지스트리의 개념은 단지 대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광기의 경계선까지 넘어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황을 겪으면서 미국인들은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명백히 실패한 현재의 시스템을 대체할 새로운 아이디어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Technocracy, Inc.는 추종자들을 끌어모았고 10년 후 수만 명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스캇의 기이한 방식, 회원들이 공개적으로 그한테 경례하게 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라디오 연설을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 운동의 장기적이고 느린 쇠퇴로 이어졌다.

허버트는 결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의 개념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Shell에 연구원으로 합류했을 때 Technocracy, Inc.의 이사직을 사임하고 그 조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기술 관료들은 '기술관료제(테크노크라시)'를 통해

'에너지'가치의 근본 척도이고

중앙 당국(정부)에 의해 모든 소비와 생산이 꼼꼼하게 분석되는,

완전히 질서 있고 통제된 사회의 윤곽을 스케치했다.

테크노크라시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생학처럼 테크노크라시의 언어와 사고는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우생학처럼, 그 이름은 희미하게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생각은 석유 관리들의 손에 계속 남아 있다.

Bill Turnbull: 만약 당신이 돈을 벌 수 있다면 더 친환경적인 삶을 살겠습니까?

Kate Silverton: 개인 탄소 배출 허용량에 대한 정부 제안이 시행된다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영국의 모든 사람들은 연간 탄소 허용량을 할당받게 됩니다.

Bill Turnbull: 슈퍼마켓 카드처럼 전자적으로 저장되어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를 구매하거나 사용할 때마다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예를 들어 가정의 가전제품에 전원을 공급하기 위해 전기를 사용합니다.

Silverton: 아니면 비행기로 어딘가로 여행을 가거나.

Turnbull: 아니면 자동차용 휘발유를 구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화 맥락 이해못한 발언]

Silverton: 그리고 남은 포인트는 중앙은행에 다시 되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운전자들과도 같이 에너지를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차입금을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출처: BBC 조식: 탄소 배급 카드 제안, 2006년 7월 20일

https://youtu.be/U7HF-ANJLXk

탄소 배급. 탄소 거래. 탄소세. 탄소 배출권 거래제.

옛날의 기술 관료들이 '에너지'를 기반으로 하고,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명령에 의해 통치되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상상했던 것처럼, "현대 기술관료제" 또한 '에너지'가 '정부간 과학자들'과 이들 주변에서 자라는 '정치적 카스트들'에 의해 예산 책정되고, 가격이 매겨지고, 거래되는 경제 질서를 상상한다.

제이 록펠러 상원의원: 환경 보호국은 하찮은 기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저는 대부분 기후 과학을 믿지 않는 웨스트 버지니아 석탄 협회에 말했습니다. 그들은 기후 문제가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그들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왔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과학은 사실이고, 과학은 분명히 진실이며, 미래에는 탄소 배출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말씀드렸듯이, 그들의 미래에는 탄소 배출에 대한 대가가 있습니다.

출처: 록펠러 상원의원이 기후과학 EPA를 옹호하다

앨 고어: 배출권 거래제(Cap and Trade) 접근 방식이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이것이 진정한 글로벌 협정을 구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조화로운 국제 세금을 상상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출처: 배출권 거래제(Cap and Trade)는 세금입니다. 앨고어

Christiana Figueres: 탄소세 또는 탄소 가격을 책정하는 다른 방법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실제로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규제할 수 있고 모든 종류의 일을 할 수 있지만 탄소세든 배출권 거래제든 탄소 가격만큼 민간 부문에 대한 강력한 시장의 신호는 없습니다. 이것이 캘리포니아가 하는 일입니다. — 또는 궁극적으로 탄소 가격을 제공하는 기타 조치, 그것은 가장 간단하고 깨끗하며 가장 강력한 신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다면, 저희는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출처: Christiana Figueres: 기후 문제 해결 - 유엔 관점

이러한 조치들은 지난 세기를 세계의 주요 자원을 독점하고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지구를 약탈하는 데 소비한 거대 석유 이해당사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중에게 팔리고 있다. 하지만 애당초 이러한 계획들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석유재벌들의 움직임은 의도적으로 대중들에게 가려져있다는 것이다.

스티브 스칼리스 하원의원: "1997년, 당신이 부통령이었을 때, Enron의 CEO, Ken Ray가 백악관에서 당신과 이런 종류의 정책, 이런 거래 계획을 개발하는 것을 돕는 것에 대해 논의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인가요?

앨 고어: 잘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저는 Ken Ray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그를 만났습니다.

스칼리스: 맞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미국의 에너지 경제를 뒤집을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상한제 및 무역 에너지 세금에 대해 우려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고어: 저는 그를 "케니보이(kenny-boy)"라고 부를 만큼 그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스칼리스: 하지만 거래 계획을 세울 만큼 그를 잘 알고 있었잖아요.

출처: 의회에 의해 폭로된 앨 고어의 거짓말

1990년대 초, 완전히 사기로 판명된 텍사스에 본사를 둔 에너지 무역 회사인, 케네스 레이(Kenneth Ray)가 이끄는 회사 Enron(엔론)은 EPA의 200억 달러 규모의 이산화황 배출권 거래제 프로그램을 주도하여 시장에서 가장 큰 거래자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비슷한 이산화탄소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클린턴 행정부, 특히 앨 고어(Al gore)부통령에게 로비를 시작했다.

'기후 변화 프로젝트'에서 탄소 배출 제한을 주장한 The Nature Conservancy와 같은 환경 단체들에게 아낌없이 기부한 엔론(Enron)은 그 후, 조 리버먼 상원의원의 환경 위원회의 전 직원인 크리스토퍼 호너(Christopher Horner)를 고용하여 배출을 제한하고 거래할 수 있는 국제 조약을 위해 로비했다.

오늘날 이 회사와 미국 재무부 사이의 회전문으로 유명한 월스트리트 투자 은행인 골드만 삭스 자산운용(Goldman Sachs Asset Management)도 여기에 동참했다. 골드만 삭스는 이전에 시카고 기후 거래소(Chicago Climate Exchange)를 최초의 북미 배출권 거래 플랫폼으로 설립하는 것을 도왔던 경험이 있다.

지난 20년 동안 '탄소 거래 시장의 창설'을 위해 로비를 벌여온 앨 고어(Al Gore)는 2004년 골드만 삭스의 CEO인 데이비드 블러드(David Blood)와 함께, 탄소 상쇄를 판매하는 투자 관리 파트너십인 세대투자관리(Generation Investment Management)를 설립했다. 데이비드 블러드는 앨 고어와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골드만에서 사임했다.

2000년대 말까지 앨 고어는 이미 세계 최초의 탄소 억만장자가 될 후보로서 환영을 받고 있었다.

앨 고어, 그는 석유재벌이다. 그의 아버지 앨 고어 시니어(Al Gore Sr.)는 옥시덴탈 페트롤리엄(Occidental Petroleum)의 석유 재벌 아만드 해머(Armand Hammer)의 절친한 친구였다. 고어의 아버지는 197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한 후, 연봉 50만 달러를 제안받고 옥시덴탈의 해머를 위해 일하러 갔다. 그의 경력 동안, 고어 시니어는 수십만 달러 상당의 Occidental 주식을 축적했으며, 이 주식은 사망 당시 그의 재산 집행인인 그의 아들 앨 고어(Al Gore)의 손에 넘어갔다. Occidental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테네시주의 사유지에서 아연 광석을 발견한 아만드 해머는 고어 부부의 땅을 사서 광업권에 대한 청구권과 함께 그들에게 되팔았는데, 이 청구권 역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앨 고어에게 돌아갔다.

2013년, 앨 고어는 그의 "Current TV" 벤처를 팔아 카타르 정부로부터 1억 달러를 벌었고, 기자들은 놀랍게도 지구 온난화 원인을 다룬 그의 새 책보다 그의 오일머니에 대해 더욱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앨 고어의 이야기는 더 큰 현상의 한 예일 뿐이다. 2006년, 미국 기후 행동 파트너십(United States Climate Action Partnership)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행동 촉구(A Call for Action)"를 만들기 위해 결성되었다.

그들은 유럽연합의 배출권 거래제를 모델로 한 '배출권 거래 체제'를 만들기 위해 미국 청정 에너지 및 안보법의 기초가 된 입법 행동 청사진 초안을 작성했다. 그럼 미국 기후 행동 파트너십의 회원들은 누구일까? 바로 BP, ConocoPhillips 및 General Motors를 포함한, 석유재벌의 후손들이다.

탄소세와 탄소 거래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는 대중들에게 힘든 매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지만, 2015년 파리 협정으로 세계는 에너지 통제와 탄소 배급이라는 기술관료주의 사회의 미래를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다면 정상회담 자체가 석유재벌들에 의해 후원되고 눈에 띄는 지지를 받은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에릭 샤츠커: 당신의 입장은 무엇이고 대통령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시겠습니까?

밥 더들리: 음, 우리는 파리 기후협정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분명히 해왔습니다. 우리는 석유 및 가스 기후 이니셔티브의 일부인데세계 10대 대기업으로서 필요한 프로젝트와 기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파리의 기후협정 개념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저탄소 에너지로 세계를 전환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저는 그 전환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출처: 석유시장과 파리 기후협정의 BP CEO 더들리

제라드 메스트랄레: 맞아요. 저는 파리에서 일어난 일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기문 총장은기후 협정이 우리 시민들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기업에도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출처: 에코 노믹스: 파리 협정에서의 기업의 역할

그러나 탈탄소 경제를 위한 새로운 '가치 척도'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신-테크노크라시 비전의 한 요소일 뿐이다.

허버트가 그의 테크노크라시의 연구 과정을 썼을 때 그는 '모든 에너지 사용에 대한 24시 감시'와 '사회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모든 제품에 대한 지속적인 데이터의 흐름' 없이는 기술 관료주의가 실현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허버트가 이를 제시한 1930년대만 해도, 그의 테크노크라시 시스템은 망상처럼 보였음에 틀림없었지만, 허버트의 테크노크라시 공상은 오늘날 일상 속에 이미 점차 확대되며 시행되어 오고 있다.

내레이터: 요즘 여러분은 "사물 인터넷 (I.O.T)"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겁니다. 흥미롭게 들리겠지만 사물인터넷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I.O.T.는 인터넷에 연결되어 더 큰 컴퓨틴 기능을 통합하고 데이터 분석 기술을 사용하여 의미 있는 정보를 추출하는 모바일, 가정 및 임베디드 애플리케이션의 진화입니다. 수십억 개의 장치가 인터넷에 연결될 것이고, 곧 수천억 개의 장치가 연결될 것입니다. 관련 기기가 서로 연결되면서 지능형 시스템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지능형 장치와 시스템 클라우드를 통해 데이터를 공유하고 분석하면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의 비즈니스, 우리의 생활, 그리고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출처: 사물인터넷이 간단히 설명됨

https://youtu.be/uEsKZGOxNKw

리포터: 대한민국 분당에 있는 이 백화점은 새로운 쇼핑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스마트 쇼퍼" 시스템으로, 고객들은 작은 스캐너를 들고 사고 싶은 물건에 태그를 붙입니다. 무거운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거니와 집으로 가져가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앱니다. 자동 키오스크에서 물건값을 지불하고 나면 그 물건들은 집으로 바로 배달됩니다.

쇼핑객: 계산대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기 전에는 스마트 쇼퍼 시스템을 이용해서 결제할 수 있어서 정말 편리해요.

리포터: 쇼핑객에 대한 편리함 외에도 이 시스템은 상점들이 고객의 쇼핑 습관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을 돕습니다.

출처: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스마트 기술

https://youtu.be/fz-1Ph1X5E0

앨리스 브라보: 스마트 시티(Smart City)를 왜 만들까요? 음, 스마트 시티는 시민들에게 더 환영받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마이클 류: 그리도 비용면에서 더 효율적이고 더 안전합니다.

카를로스 히메네스: 스마트 시티는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하고 그들의 지역사회에 더 많이 연결시킵니다.

출처: AT&T 스마트시티

네레이터: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도시는 바로 무역, 혁신, 문화, 기회의 중심지이죠. 따라서, 도시는 서로 다른 상호연결 시스템으로 구성된 복잡한 실체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고 이러한 시스템에 압력을 가함에 따라, 중요한 변화는 도시들이 이 과제, 즉 데이터 증가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도시들은 점점 더 도구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센서는 도시 전체 시스템에 통합되어 도시 활동과 운영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브리지의 센서는 물리적 상태에 대한 데이터를 전송합니다. 고속도로의 카메라는 교통 흐름을 중계하고 디지털 미터기는 물과 에너지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기록합니다. 모바일 및 소셜 채널은 지방 정부와 시민이 다른 정부와 소통할 수 있게 해 유용한 데이터의 또 다른 소스를 만듭니다. 고급 분석을 통해 이제 이러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 내에서 동향과 패턴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정보는 대시보드, 시각화 및 경고를 통해 정보를 통합, 수집 및 공유할 수 있으므로 시스템, 기관 및 그룹 간의 이해와 협업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출처: 작동 방식: 더 똑똑한 스마트 도시

내레이터: 스마트 홈(Smart Home)은 그리드와 통신하고 소비자가 전기 사용량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스마트 미터기를 통해 가정의 전기 소비량을 더 자주 측정함으로써 전력 회사는 고객에게 전기 요금을 관리하기 위한 훨씬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마트 홈 내부에는 홈 에어리어 네트워크(HAN)는 스마트 기기, 온도 조절기 및 기타 전기 장치를 에너지 관리 시스템에 연결합니다.

출처: 스마트 그리드는 무엇인가?

https://youtu.be/JwRTpWZReJk

스마트 미터기를 사용하면, 그들은 여러분의 모든 가전제품과 365일 24시간 연결된 통신을 바탕으로 여러분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대중의 반발이 없다면 모든 가전제품에 무선 송신기가 장착되어 있어야 하며 일부 "스마트 프로그램"에 따라 인증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건강 문제 외에도, 스마트 미터기가 하루에 평균 13,000개의 마이크로파 펄스를 방출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가전제품도 동일한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마트 미터기와 즉각 통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사생활 문제와 관련해서는, 현 CIA 국장인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David Petraeus)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CIA는 당신을 감시하기 위해 스마트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할 것이다."

이건 마치 이제 그 지점에 다다랐다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 느끼고 있다. 그들이 점점 더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을. 이건 마치 통제자들의 집단적인 힘과도 같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요?" 그들은 거의 우리에게 학교 불량배와 같은 방법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래서 뭘 할 수 있는데요? 뭐 어떻게 할 건데요?"

다시 한 번, 우리는 이러한 스마트 기술들이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믿도록 요구받고 있다. 이 기술이 지구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속고 있다.

테크노크라시의 기술관료적 어젠다는 지구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을 돕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일상 생활의 모든 측면에 대한 '완전한 통제'에 관한 것이다.

지구 전역에 걸친 인터넷 드리드망이 지구 전역-도시-가정-내 손의 전자기기까지 이어진다. 촘촘한 인터넷 그리드망을 통해 개인이 소비하는 모든 에너지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관리되고 통제된고, 개인이 소비하는 모든 재화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관리되고 통제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터넷 그리드망은 지구 전역-도시-가정-내 손의 전자기기-인체까지 직접적으로 이어져, 표면적으로는 생체 디지털 ID 기술 일상 도입을 준비 중이며, 은밀하게는 인체의 전자기장이 외부전자기장에 의해 컨트롤되는 전자기 마인드컨트롤 국방 기술로도 사용된다.

인터넷 그리드망은 그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모든 통제(CONTROL)을 직간접적으로 모두 가능하게 한다.

테크노크라시 기술관료제는 두 가지 단계가 동시에 운영되고 있다.

첫 번째 운영 측면은 스마트 그리드 시스템과 관련이 있다. 다양한 테크노크라테스적 혁신과 감시. 운영적 차원에서 그것은 과학적 독재정권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 세계가 4차 산업혁명의 첨단 과학 기술을 등에 없은 빅브라더 감시 통제 사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너무나 분명해서 더 이상 선견지명을 갖출 필요도 없다.

그리고 두 번째 전략적 기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지구 전체에서 대규모 '자원' 장악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자원 횡령을 말할 때마다 당신은 록펠러의 입장에 있어야 한다. 은행가의 입장이든 로스차일드의 입장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돈이 바닥나면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이 만든 화폐제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를 다 빨아들이면 남는 게 뭐가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과 같이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보통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 특히 은행가들은, "돈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돈의 다음에는 무엇이 돈의 가치를 대신할까?"를 항상 생각한다.

록펠러 가문은 특히나 항상 그래왔다. 그들은 항상 자원 집약적인 가족이었다. 애초에 석유가 전부였다. 그것은 자원이었고 그들은 에너지가 다른 어떤 종류의 자원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들은 그것을 처음부터 정확히 이해했고, 그것이 그들이 에너지에 대한 독점권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이다.

자, 오늘날은 돈이 고갈되고 있다.

그리하여 남은 유일한 일은 자원 자체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속 가능한 개발'이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굳이 꼬집어 말하자면 파벌에 속하지 않는 민간 기업들로부터 세계의 자원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이익을 위해 그들이 관리할 글로벌 공통의 신뢰에 그들 자신을 투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모든 자원이 소수에 의해 소유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재량에 따라 해당 자원을 사용하는 신-봉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허버트(Hubbert)와 그의 동료들처럼, 이 의제에 참여하는 기술 관료들은 테크노크라시와 엔지니어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를 개척했다. 하지만 석유재벌들과 은행가들이 테크노크라시 아이디어에 자금을 댄 이유는, 테크노크라시가 석유재벌들과 은행가들이 (어떤 자원도, 어떤 상품도,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시스템의 지배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21세기에 그 기술 관료주의적 비전이 가시화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스마트-'로 둔갑된 이 기술 침습은 탈탄소 미래가 석유정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믿고, 일상에 편리함을 더한다고 믿는 대중의 도움을 받아 더욱 수월히 진행되고있다.

이미 그들이 오랜 세월 설계한 시스템에 길들여진 대중은 언제나 그들의 예상대로 쉬이 이끌려진다. 더 이상 그들의 예상이 빗나갈 일말의 가능성 조차 없다.

결론

석유. 그것은 결코 석유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통제(CONTROL)에 관한 것이었다. 에너지 생산 및 소비에 대한 통제. 전 세계 자원에 대한 통제. 인구에 대한 통제. 인간 자체에 대한 통제.

엘리트들이 내세우는 다른 모든 것들은 그들이 처음부터 추구해온 것에 대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돈이 아니라 지구에 당연히 존재하는 자원과 에너지 자체를 확보하여 이에 가치를 매기려 한다. 그들은 세계의 모든 거주가능한 지역을 확보하여 지배하고자 한다. 그리고 확보한 자원과 에너지를 대중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행정 계층에게도, 둘 다 팔 수 있다는 구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들은 해야만 한다. 그것이 지구 온난화의 히스테리건, 어젠다 2030이건, 우생학이건 간에,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공통의 실마리는 바로 강압적인 힘을 통합하고 행사하려는 욕망이다. 우생학의 경우 궁극적인 힘을 공고히 하고 행사하려는 욕망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누가 살 것인지 누가 앞으로 유전자 풀에서 존재하도록 허용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다.

상황은 암담하다. 많은 대중들이 석유재벌의 궁극적인 의제인 "기술민주적 통제, 일상 생활의 세세한 관리, 그리고 궁극적으로 유전자 풀에서 "총알받이들"인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 모두 대중들 자신을 위한 최선의 이익이라고 믿게끔 속아왔다는 사실응 상황을 훨씬 더 암울하게 만든다.

"지속 가능한 발전"과 "탈탄소" 경제라는 연막 뒤에 가려진 석유재벌들의 완전한 통제라는 진정한 목표 달성은, 현재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지고 있다.

빅 오일(석유), 빅 파마(제약), 녹색 혁명, 유전 공학, 우생학 지구 환경 운동, 첨단 과학 기술, 테크노크라시, 교육, 언론. 천 명 중 단 한 명도 이러한 개념들의 역사적 발전과 의제와의 연관성을 상세히 알지 못한다.

앞서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는가"에 이어 이번 게시물까지 연달아 모두 정독한 당신은 아마 지금 그 천 명 중 한 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정보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재차 거듭하지만 해법을 향한 첫 번째 단계는, 전 세계 국민들이 그들의 의제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닳아 소실되기 전에 그들의 실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석유재벌들의 완전한 통제 추구에 대한 탐구가 깊어지면서, 이 모든 것이 150년 전 항상 도망만 다니던 보잘 것 없는 뱀 기름 판매원인 "악마 빌" 록펠러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기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른다. 사기의 범위와 사기 피해자들의 숫자 외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제 대중에게 먹이고 있는 뱀기름의 실체를 알았으니 유일하게 남은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그것을 마실 것인가?"




Comments

Popular posts from this blog

화이자 부작용 보고 문서 공개 - 백신의 치명적 실태 보고

[백신 사망 보고서] 팬데믹의 실체

바이오 디지털 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