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과 실

 

미국의 한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새로 선출된 한국 대통령이 좋은 사람이라며?" "음?" 이유를 물으니 대통령을 잘 뽑아서 한국의 방역 체제가 느슨해졌다 전해들었다는 것이다. 겉잡을 수 없이 외딴 곳에서 배회하는 이야기에 그만 벙이 쪘지만, 그래 어쨌든 정세에 큰 관심이 없는 미국인 친구가 전해들었을 만큼 한국의 방역은 분명 완화되고 있다.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규제에 배려를 한움큼씩 깃들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을 위시한 전 세계 정부의 방역 체제가 느슨해지고 있다. 이를 승리라 착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이는 또 다른 관문으로 향하는 과정으로 시기상조의 안일함은 금물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되서 유감이지만 우리는 실제로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 전 세계 수많은 대중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받은 생물 무기의 아버지 앤써니 파우치는 경력 단절이라는 타락의 명예조차 얻지 못했다.

스며드는 봄기운에 눈사람이 퍽석 무너진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깨어나 창문의 커튼을 열어 젖혔다. 미처 다 뜨지 못한 졸린 눈을 부비적되며 창 밖을 바라보니 시야에 파랗고 노란 자욱한 안개가 한 가득 밀려든다. 그리고는 이내 대항해야 할 코로나 적군이 사라져 있음을 자각한다. 어? 우리가 싸우려고 했던 코로나 언덕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모든 포커스가 바뀌면서 새로운 적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근데 낯설지 않은 것이 마치 예전의 적과도 같은 느낌이다. 사실 소셜 미디어의 많은 프로필 사진들이 "백신 접종 완료"에서 "우크라이나의 파랑/노랑 깃발"로 급속도로 바뀌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 다. 코로나 언덕에서 마스크를 쓰고 노닐던 사람들이 이젠 우크라이나 언덕으로 우르르 달려가 우크라이나 깃발을 흔들고 있다.

버려진 코로나 언덕 위에 서서 그들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꿰뚫어 보았다며 당돌하게 깃발을 흔들어 보일 용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패배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들은 많은 것을 얻었고,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득과 실을 모두 나열하는 것은 자못 벅차지만 당장에 눈에 띄는 것들을 한 번 살펴보면 우선 많은 사람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야외 의무 마스크 착용 폐지'가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상당 시간 전부터 야외 마스크라는 짐짝이 사라지고 있었다. 마스크 없이 거리를 자유로이 활보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한국은 마스크를 벗으면 마치 총살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모두가 코끝까지 천쪼가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다. 하지만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야외 마스크 착용 해제를 선언할 것이라 발표함에 따라 한국도 드디어 프리 마스크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실외 의무화는 폐지되지만 실내에서는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왜? 이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는 세계 곳곳에서 마스크 의무화가 폐지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상당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득한 업의 첫 번째 예시이다.

코로나 세파에 2년 여를 부대끼도록 한 후, 드디어 정부가 야외 마스크 족쇄를 풀어주겠다며 일말의 배려를 선사하는데 도통 대중은 우물쭈물해 한다. 세뇌의 소화에 능란해진 민중의 지능에 새로운 OS 버전이 업데이트 되었다. 순종과 획일화의 용이.ver.

여기 울타리 안에 가두어진 양들🐑🐏🐑🌱이 한가득 있다. 양치기는 양들에게 "이 울타리를 벗어나면 큰일 나. 저 밖에는 무섭고 위험하고 악한 것들이 득실거려. 여기 안에서 우리가 하는 말을 믿고 따라야만 다같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어. 이 울타리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배반자야, 우리는 모두 이 안에서 함께 행복해야 해"라며 선의와 구제의 아포리즘으로 양들의 인지 구조를 세뇌시킨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양치기는 울타리 문을 살포시 열어 보이며 울타리를 벗어나고픈 양들은 저 너른 덜판으로 달려나가도 괜찮다 제안한다. 하지만 문 밖으로 나서는 양은 단 한마리도 없다. 미동조차 않는 양들이다.

이것이 도그마의 기본 원리이다. 세뇌된 인식의 흐름과 환경에서 안심을 찾은 덕에 더 이상 자존적 의지가 불필요하게 된 양들은 스스로 사고할 수가 없게 되고 그저 양치기들이 메세지를 전달해 주기를, 저들을 보호해 주기를 기다리게 될 뿐이다. 그나마 주체적 사고를 지녔다하는 양들은 전달받은 메세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뿐이다.

저 자신이 메세지를 전달하는 위대한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의 뿌리가 모두에게서 송두리째 뽑혀져 있다. 통치를 위한 도그마가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모든 개인들은 저 자신이 얼마나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사람인지 미처 알 길이 없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사회적 지위에 사람들의 가치가 갈림되고 이미 자신의 존재에 암묵적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과 발언에도 즉시 가치가 매겨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생과 동시에 맞이한 세상에선 '학습과 교육'이라는 행위를 통해 뇌를 수동시키는 훈련들만이 삶을 전행토록 하기 때문에 자신이 창의자라는 존재임을 미처 자각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할 뿐더러, 사고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고하는 법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가 없게 된다.

자연과 건강과 행복을 통해서는 자본의 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것처럼 그와 연계되는 인식의 힘인 상상과 창의에서는 역시 되돌아오는 상찬이나 이익이 없음으로 스스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없게 된다. 쓰임되고 소비되어 지위와 자금의 보상이 이루어져야 존재의 의미를 찾으니 결국 남는 것은 끝내 충족되지 못한 내면의 공허함, '나'를 만나지 못한 비애 뿐이다.

드디어 한국에서도 야외 마스크 의무화 폐지 가능성을 발표했다. 분명 모두가 환호해야 하는데 반응이 극명하게 반으로 갈렸다. 오래도록 마스크의 편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환호하기는 커녕 시원섭섭하다는 듯한 미적지근한 반응을 내보인다. 하루 빨리 벗어 던지고픈 사람들 틈으로 마스크 고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메이크업 시간이 줄어들어 편하다. 낯가림 용으로 좋다. 상사를 욕하기에 좋다' 등의 갖가지 연유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참담한 것은 '코로나가 재확산되면 어쩌려고 벗냐'는 염려를 내보인다는 것이다.

'국민의 공익을 위해 권위를 따른다'는 높은 도덕성의 확립과 함께 맹목적인 복종과 두려움이 양산되었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 뒤로 바로 미신이 따른다. 화를 물리치기 위해 부적을 쓰는 것과 같이 코로나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일종의 맹신이 생겨났다. 머지 않아 사람들은 처음 어떻게 마스크를 처음 착용하기 시작하게 됐는지 그 이유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외출할 때 휴대폰을 챙기듯 마스크를 귀에 걸며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어느덧 또 하나의 생활 속 습관으로 자리했다.

"마스크를 쓰는게 어때서?"라는 반문엔 강요가 따를 수 없는 일 이 역시도 명백한 자유의 영역이다. 도심의 공기가 거북해서, 본인의 편의를 위해서 얼마든지 착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스크 착용'이 표정을 통해 자연스레 의사소통하는 인류로서의 기본적 정서를 배제시킬 때, 호흡의 불편함으로 뇌를 힘들게 만들고 도리어 인체의 면역력을 약화시킬 때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에 굴복하는 맹목적 복종의 형태로 사용될 때에는, 과감히 던져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처음부터 우리 삶의 필수템이 아니었다 마스크는. 실행되지 말았어야 할 권한이 맹목적 순응의 효과적 형태를 획득했고 이제는 잘 훈련된 덕에 언제든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금세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사회적 불편감을 연신 쏟아내는 미디어 기계의 수고 덕택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 사이엔 불신의 장벽이 상아탑 재질로 축조되어 오곤 있었지만 팬데믹과 전쟁의 연쇄적 사건들로 인해 그 장벽이 이제는 창공까지 올라 서로를 완전히 분리시키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우리는 '분리'에 익숙해졌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얻은 것과 동시에 우리가 잃은 것 중 가장 무거운 득실이다. 사랑과 신뢰와 화합을 통해 사람들이 유대하는 것만큼 위대한 힘은 없으니 공동체를 지향하는 선량한 대중을 '와해'시키는 일은 곧 지배층에게 득이 된다.

행동은 모두 '인식'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개인의 인식이 '수동'되도록 평생을 학습 및 보상으로 훈련시키고, 개인들이 서로 연대할 수 없도록 유대를 '분리 및 해체'시키면, 민중은 그 자체로 훌륭한 피지배층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붕괴되고 말았다 사회 심리학이. 인간 상호 작용의 기본적인 단절에서부터 불안, 조급함, 우울증은 말할 것도 없고 폭력, 분노, 분쟁, 불협화음, 약물 사용 및 자살에 이르기까지 전 범주를 아울러 인류 간에 규합할 수 있는 근본적 연결 고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까지 자연스레 끊어졌으므로 이제 미디어 기반의 인문학적 컨트롤이 조금만 수행되어도 그들은 언제든지 우리를 원하는 곳으로 이끌 수 있게 되었다.

팬데믹 방역의 익숙한 훈련 덕에 서로를 회피하고 정서적 결핍을 감내하는 데 부쩍이나 익숙해진 대중들은 민족 갈등을 연유로 자신에게 스며들고 있는 물자적 내핍마저도 자연스레 소화시키는 지경이다. 지구의 인류는 '박탈과 수탈'을 아무런 의식없이 겸허히 체화해 나가고 있다.

그들이 펼쳐내는 일련의 의제들을 일종의 플레이북으로 간주한다면 빅 브라더 세계의 잔인함을 발현시키기 위해 이미 충분한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꾸준히 맹위를 떨치는 전쟁은 어느 순간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갈등의 2D 관점을 확실하게 키워냈고, 끊임없이 불안을 조장하는 선전은 가차 없이 대중들을 혼돈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극단적 민족주의와 단일한 시나리오에 순응하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자극제는 바로 '증오'이다. 내재된 모두의 증오가 꿈틀거려 말쑥한 주단으로 외화되었고 그 위로 마련된 한 짐의 플랜을 지휘할 군주들이 당당히 행진을 이어나가고 있다.

나아가 코로나는 대중에게 명확하게 정의된 하나만의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훈련시켰다.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마련된 창구라는 '언론'은 부단히 확성기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에 부수되는 2차적 의견들은 즉시 허위 정보 내지는 경고 라벨이 붙어 비정상으로 저하되었다.

회색은 없고 흑백만이 존재한다.

무수히 많은 언어와 정의들이 난무하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다수의 인구가 마치 하나의 사람인 양 모두 동일한 관점과 인식 체계를 지니게 되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는 뇌의 회로가 아무런 개별성 없이 모두 하나의 회로로 통일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무지성 세뇌가 아닐 수 없다. 인식화의 기반인 '단어'의 창조를 노드로 활용해 공통의 노드를 생산 및 자극시킴으로써 대량 인구의 인식 구조가 공통적으로 링크 및 배치되어 가고 있다.

아무런 도로가 깔리지 않은 너른 대지와도 같은 뇌들은 자신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의 상실에 절통을 느끼기는 커녕 미디어 불도저가 밀어 고르는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통의 지도를 그려나가고 있다. 모두의 머리에 그려지는 '미디어 지도', '나의 지도'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코로나와 백신에 관한 모든 것'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관한 모든 것'으로 변모해 버린 것 처럼 이제 사람들은 매우 다른 종류의 두 사건이 대해 예외없이 일치된 하나의 주류적 관점을 지니게 되었고 주류 내러티브에 도전하는 모든 의견은 허위 정보라는 꼬리표와 함께 배척토록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병동화된 전체주의를 관통 중에 있다.

"백신을 맞기 싫었어. 부작용이 있을까봐.

그래도 사회 생활을 해야 되니까 맞을 수 밖에 없었지.

백신을 맞을 때 속으로 계속 되뇌였어.

건강할거야.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거야. 괜찮아."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의 대화

COVID-19 조작을 통해 얻은 근거는 매우 명확하고 실질적이다. 지난 2년간의 사건들(여행 제한, 계좌 폐쇄, 모임 제한, 격리, 강제 의료 개입, 의제에 걸맞는 단어 재정의와 같은 사건들)에 의해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은 정상화되었고, 미래에 요구되는 모든 급진적인 요구는 이 사건들에 의해 적절히 기름칠 되어 앞으로 포장 도로를 더욱 수월히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보다 미묘한 영역에서는 [백신 여권]이라는 개념에 의해 적절히 포장된 CBDC와 디지털 ID와 같은 빅 브라더 의제들에 대한 토대가 확고히 세워져 있는 것을 접할 수 있다.

소위 인공 신이 된 자들은 주사기 형상을 한 생물 무기를 통해 쓸데 없이 음식만 먹어치우는 지구 자원 고갈자들을 제거하며 초기 단계를 달성해 나갈 수 있었고 노령 인구에 대한 4차 접종은 지금도 열렬히 진행 중에 있다. '백신'으로 인한 무고한 민중의 수많은 부상과 사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인명의 죽음을 초래하는 연유가 갖가지로 다양스런 상황에서 백신은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부작용의 사소한 성가심쯤으로 비춰질테니 여전히 백신에 대한 민중들의 맹신은 변함이 없고 현대를 정리할 5세대 전쟁은 쉼없이 실현되고 있는 터수로 차마 안식할 겨를도 없다.

우리는 득하기는 커녕 정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상실했다. 많은 측면에서 그들이 득한 것은 아직 다가오진 않은 그 웅장한 시스템의 매우 기초적인 틀에 불과하다. 비록 겉보기에는 매우 심플한 구조를 지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콘크리트 슬래브는 그 위에 축조되는 건축물이 얼마든지 복잡해질 수 있도록 불후의 뿌리를 제공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기능을 포괄한다.

그 구조물의 디테일한 세부 사항은 아직 미정이다. 하지만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한 건축물이 감히 모두의 집으로 축조된다 하면은 우리가 유유히 즐기던 확 트인 전망마저, 자유와 창의마저 아무런 저항없이 수탈될 것이라는 염려로 비운의 건축물을 무너뜨리고자 거듭 능란해지는 일은 무취의 바다를 마음껏 자맥질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의식은 문명화된 인류가 원시의 인류보다 더욱 고양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어설프게 자위하는 데 필요한 식수와도 같은 요소이다. 하지만 본능과 순리의 지향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궁극에 달함에 따라 그 교양적 의식마저 통째로 집어삼켰다.

삼켜지지 말라. 언덕에 머물러 '나'를 지키고 발산시켜야 함이라. 우리 모두가 지닌 고유의 힘을 인식하고 지켜야 함이라. '나'를 침투하는 전쟁은 이제 막 그 조야한 깃을 세차게 휘날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거대해 보이지만 실로 탐욕이라는 비루한 힘들에 얼기 성겨 빗장과도 같은 부실한 이 깃은, 인류를 무한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들에 결코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민중의 순량함이 궁극적 본질을 겸해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포말들에 결국 젖은 종이처럼 축 늘어질 얄팍한 야욕의 깃이다.

마음껏 발산하고 창의하고 사랑하고 유대하자.

모든 인공의 허울을 차근히 걷어내는 것이 곧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모두가 한 껏 자연을 가득 닮아 품어나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니, 나도 곧 자연이었음을 자각하면 더할 나위 없을테다.

그렇게 현실로 자아낼 지향을 창안해 나아간다. 이치나 아취를 헤아릴 겨를 없이 존재만으로 조화의 경지를 유려히 이뤄내는 저 자연들처럼 인공의 파편들에 연마되어 심해에 티없이 잠겨버린 개인들의 무한한 힘을 찾아 꺼내어 피울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를 그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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